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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양조씨 집성촌-경북 상주군 낙동면 승곡리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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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경북 상주군 낙동면 승곡리131-. 마을 40여 호 중 30여 가구가 조씨 일문인 호군공 사충의 후손들로 18대를 이어 살아가는 한성받이 마을이다.
이 마을이 풍양조씨 호군공파의 집성촌이 된 데는 다음과 같은 연유가 있다.
고려 공민왕 20년, 요승신돈이 국정을 뒤흔들며 음란·방탕한 생활로 민심을 흉흉케 할 때 사충·사공·신·임 등 4형제는 신돈을 제거하고 기우는 여조를 바로 잠을 것을 모의한다. 그러나 이들 4형제의 거사는 사전에 발각되어 주모자였던 둘째 사공은 신돈 일파에 의해 처형당한다. 『쿠데타가 실패로 돌아가자 맏형인 사충께서는 일가몰살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이곳 승곡리 깊은 산골에 몸을 숨기신 것이지요.』
이곳에서 60평생을 살아온 조욱연씨(62)는 그때의 화로 둘째 사공어른은 대가 끊겼고 신과 임형제는 ▲남 부여와 황해도 해주로 피신했었다고 내력을 설명한다.
마을 입구에 고즈너기 자리잡은 호거공 18대 손 조성덕옹(70)의 한옥.
퇴색한 단청이며 이끼 오른 기와가 3백년 마을의 역사를 말해주는 것 같다.
툇마루에 오르면 갑장산 문필봉이 눈앞에 다가선다. 문필봉이 우뚝 솟아 숱한 논객을 낳았다던가. 사랑채 선반 위에 가득히 꽂힌 12대문 집이 글이 깊은 집안임을 느끼게 한다.
『이조에 들어 세도를 잡았던 집안은 호군공의 동생인 신 회양공이시지요. 한 핏줄 형체간이면서 왕조에 대한 충성심은 서로 달랐던 모양입니다.』
조옹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한 집 안에서도 삶의 자세가 각각 다른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이라며 소탈하게 웃는다.
그러나 호군공파의 후손들은 임진왜란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의병항쟁의 선봉으로 활약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5대 손 조정. 의병조직책으로 활약했을 뿐만 아니라 난이 일어나고 6년 동안 『임란일기』를 기록, 후세에 남겼다. 조옹의 서가에 보관되어 있는 이 문헌은 조씨가 문의가 보일뿐더러 귀중한 전사이기도 하다.
『일기에는 날자·날씨는 물론 전국각지에서 출몰한 왜병의 동태, 이에 대처하는 조정의 움직임, 의병들의 항쟁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읍니다.』
조상의 숨결을 느끼는 듯 책갈피를 접는 조옹의 손길이 가늘게 떨린다.
무해무득이 주민들의 심성. 때문에 벼슬길에 오르거나 크게 재산을 모은 사람도 없다고 한다.
이조를 통틀어 문과급제 14명, 진사급제 20여명을 냈을 뿐 권력을 쥐고 흔들었던 인물은 없다. 조경희씨(영남대총장), 조상희씨(공박·경북대교수)등이 학계에서 활약하는 상주출신. 국회의원으로는 유일하게 조광희씨(4대 민의원)가 있을 뿐, 현역으로는 공무원 5명, 교육자 10여명 정도.
주민들의 주 소득원은 한우사육.
축산조합의 장려로 가구 당 5∼15마리씩의 소를 길러 연평균 2백50만원의 소득을 올리고 있다.
그러나 마을의 발전은 비교적 뒤떨어진 편으로 승곡리와 상주읍을 잇는 2km의 도로를 포장하는 게 주민들의 숙원사업.
마을 한가운데 나지막한 야산 밑에 자리한「양진당」은 『임란일기』를 쓴 조정이 여생을 보냈던 99칸 기와집으로 호군공파 후손들의 마음의 고향. 올 들의 문중에서는 이 「양진당」을 보존키 위해 문화재로 지정 받고 보수정화 사업을 벌이고 있다. 문중에서 2천여만원, 문화재당국이 1억여원을 각각 투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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