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초기의 선교사들(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도착한 해인 1885년 5월, 감리교 소속의 「윌리엄·스크랜튼」부부, 그리고 한달 뒤엔 그 어머니「메리·스크랜튼」이 한국 땅을 밟았다.
「스크랜튼」박사는 예일대를 졸업하고 뉴욕 대에서 의학을 배운 의사.
감리교선교사로 한국에 파송돼 감리교선교병원을 설립했다.

<한국 정부 우려참작>
「메리·스크랜튼」여사는 도착과 동시에 서울정동의 초가 19채와 그 옆의 빈터를 매수, 여자학당과 부녀 원을 지었다.
설립목적은 「조선 여인들에게 새로운 부덕을 가르치고 또한 친척과 친구들에게 십자가의 도를 전파하도록』하는 것으로 오늘의 이화의 시작이었다.
초기선교사들이 택한 전도방법은 병원·학교설립·개인간의 사사로운 접촉을 통한 소극적인 것. 종교로 인해 외국으로부터 침략을 받지 않을까, 또 새 종교의 신봉자들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까 우려하는 한국정부를 자극하지 않기 위함이었다.
초창기 전도방법 가운데 특이한 것은 노방전도. 『우리는 한국말을 조금 알기가 바쁘게 매일 시간을 정해놓고 사람의 왕래가 잦은 길에 나가 성경책을 꺼내놓고 읽기 시작했다.
그러면 이상히 여긴 사람들이 추위에 하나 둘씩 모여들어 귀를 기울이고,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은 묻기도 했다.
짧은 한국말 실력이었지만 우리는 성실히 답변했다. …이 방법이 점차 확대, 대로상에서 큰 모임이 열렸고, 곳에 따라서는 대로변에 예배처소가 생기기도 했다.』(「H·G·언더우드」의 『한국의 부름』)
1886년 「언더우드」는 한 한국인에게 최초의 세례를 베풀었다. 노도 사라고 불리던 이 사람은 「앨런」의 한국말 선생으로, 제중원 「앨런」의 사무실책상에 놓여있던 『마가복음』 과 『누가복음』을 훔쳐 읽고 크게 감명 받아 「언더우드」를 찾아가 최초의 세례교도가 됐다.
1887년 가을「언더우드」는 처음 지방순회전도를 시작했다. 당시로서는 외국인이 지방여행을 한다는 것은 극히 위험하던 때였으나, 「언더우드」는 이에 개의치 않고 개성·황해도 송천·평양·의주 등을 거쳐 서울로 돌아왔다.
「언더우드」는 이때 한국개신교의 요람인 황해도 송천(소래) 에서 7명의 한국인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떠날 때 말한 필 가득 싣고 갔던 성경을 모두 나눠주고 돌아왔다.
1889년 3월 30세가 된 노총각「언더우드」는 같은 장로교선교부 소속 여의사로 한국에 파견돼 제중원에서 근무하고 있던「릴리어스·호튼」양과 결혼, 신혼여행겸 전도여행으로 북한여행을 했다. 「호튼」양이 민비의 시의로 있던 덕으로 왕실에서 발급한 특별통행증을 소지하고, 「언더우드」는 말을, 「호튼」양은 가마를 탔다.

<한국의 소돔 정복>
서울에서 개성·평양·강계를 거쳐 의주까지 돌아오는 이 긴 여행얘기는「언더우드」부인이 훗날 한국체류기로 발간한 『상투장이 속에서의 15년』에 잘 그려져 있는데, 당시의 생활상을 상세히 기록한 내용과 회귀한 사진 등은 당시 사회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있다.
초기 선교사에서 뺄 수 없는 사람은 미 북장로교선교사로 북한 선교의 개척자인 「새뮤얼·모페트」(마포삼열)목사. 그는 미인디애나주 출신으로 신학교 졸업직후인 1890년1월 내한,「언더우드」의 고아원사업을 돕다가, 곧이어 북한전역을 그의 선교지역으로 배정 받았다.
1890년 여름부터 시작된 평양·의주를 거점으로 한 「모페트」의 선교활동은 실로 눈부신 것이었다.
평양은 당시 선교사들 사이에서 「한국의 소돔」으로 불리던, 1886년 제너럴셔먼호사건 때 「토머스」목사가 순교한 곳으로 가장 비 기독교적인 곳이었으나, 만주를 거점으로 한 기독교 권서 인들의 활약과 「모페트」목사의 열성적인 선교, 그리고 서북인 특유의 진취적 기질이 합쳐져 평양은 「한국의 예루살렘」으로 바뀌었다.
「모페트」는 후에 평양에 한국 최초의 장로교 신학교가 생길 때 설립자의 한 사람으로 참가했으며, 한국예수교장로교 노회의 초대회장, 그리고 평양신학교와 숭실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초기선교사들은 특히 경제적 문제에서 미국공사관의 도움이나 본국선교부의 지원 외에 독자적인 활동을 벌이지 않으면 안됐다.
미국 북장로교의 경우 조선선교기금으로 책정된 예산이래야 당시 돈으로 미화 1만 달러가 고작. 이 때문에 선교사들은 『활동에 필요한 자금과 선교를 위한 생계보장을 위해』어떤 수단을 강구하지 앉을 수 없었으며. 이 같은 상황은 그들로 하여금 복음전파 사업과 상업활동 사이를 오가도록 했다.
이들 선교사들이 가장 쉽게 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서구(주로 미국)의 새 상품을 한국인들에게 소개, 판매하는 일.
선교사들이 들여온 상품들은 조선상인들의 환심을 샀으며, 나중에는 선교루트를 이용, 본격적으로 상품을 들여오기에 이르렀다.

<자봉틀 들여와 팔아>
개중에는 완전히 상인의 지경에까지 이른 경우도 있었는데, 「앨런」이 선교본부에 보고한 바에 따르면 일부 선교사들은 석유·석탄·농기구 등을 수입하고 부동산에 투자하는 등 본격적인 상업활동을 벌이기까지 했다.
원산의 한 선교사는 개인명의로 과수원을 경영했고, 제중원의 한 의사는 자봉틀 1백대를 들여와 일반에 판매하기도 했다. 또 1903년에는 몇 몇 선교사들이 중심이돼 압선강에서「불법」으로 목재반출계약을 맺고, 3천 그루에 가까운 나무를 벌목한 일까지 있었다.
이 같은 선교사들의 상행위에 대해 선교본부의 한 목사는 1905년 발표한 한 글에서 『장차 우리의 선교사업은 우리가 그것을 원하든 원치 않든, 좋건 나쁘건 외교와 상업의 영향을 밀접하게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솔직이 털어놓고 있다.
한미수교 직후인 1884년부터 미국인 선교사들에 의해 개화의 한 형태로 한국 땅에 발을 내려 이제 1백년의 선교역사를 바라보게 된 개신교 기독교는 그 동안 세계 선교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의 대성 장을 기록, 현재는 신도수 7백만에 교회수 2만1전2백여개로 늘어났고 민족종교의 하나로서 한국인들의 정신세계에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글-정우량기자·사진-채흥모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