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9)-혁명전야⑧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5·16주체와 장도영 총장사이에 서로 주장이 다른 사전관계는5·16 72시간의 소용들이 속에서 묶어 살피기로 하고 일단 5·16주체에 합류한 소수의 민간인 협력자로 얘기를 옮기자. 민간인 협력자가 맡은 역할은 자금·정보수집, 그리고 인쇄담당이 전부다.
민간인 협력자는 주로 박정희 소장과 이주일 소장·김종필 중령 등과 과거에 친분을 맺었던 사람들에 한정되었다. 이중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장태화씨 (전 서울신문사장) .
장씨는 48년 박 소장이 대위로 육군사관학교에 근무할 때 박 소장과 대구사범 동창인 형의 소개로 알게 되었다.
장씨는 그 이듬해 육본정보국장 백선엽 중령의 추천으로 정보국에서 박 소장(당시 소령)과 같이 일을 하게 된다.50년 방첩부대로 자리를 옮긴 장씨는 육본정보실장이던 박정희 소령과는 직책상 자주 만나야했고 이후 줄곧 박 소장을 도왔다.
5·16거사의 준비과정에서 장씨가 맡았던 주임무는 정보수집.
4월 위기설이 정가를 술렁이게 했던 3월초. 대구로 내려간 장씨에게 박 소장은 계획이 각 수사기관에 탐지되지 않도록 역 정보를 투입하고 각 수사기관의 동태 등 정세분석을 의뢰했다. 그 무렵 정부는 4월 위기설의 근원을 캐기 위해 전 수사기관을 동원하고 있었다.

<족청계 장교 팔아>
박 소장의 지시를 받은 장씨는 상경하자 곧바로 경찰정보관계자와 접촉을 꾀했다. 그의 첫 대상자는 치안국정보과 중앙분실장 최난수씨. 장씨는 평소 친분이 두터운 그에게『군내의 족청계 출신장교들이 쿠데타계획을 꾸며 움직이고있다』는 역 정보를 흘렸다. 중대한 정보를 제공받은 최씨도 장씨에게 그들이 입수한 정보도 털어놓았다.
김동하 예비역소장과 조선대학교 총장 박철웅 등의 쿠데타 모의정보였다.
장씨는 적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김동하 장군은 사실상 거사준비를 위해 박 소장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정보는 즉각 박 소장에게 보고되었고 박 소장은 김동하 장군에게 연락을 취해 행동에 주의할 것을 당부했다.
장씨는 민주당 정부가 어느 정도 쿠데타에 관심을 갖고 있는지를 캐기 위해 고위층과의 접촉을 모색,장면 총리의 고문이요 측근자였던 김철규 신부와 만났다.
장씨는 김 신부에게『4월 위기설이니, 족청계 쿠데타 설이니 하고 소문이 파다한데 신부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고 속을 떠보았다. 그러나 김 신부는 의외로 냉담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 아닌가.
『쿠데타요? 어림도 없죠. 첫째로 유엔군이 한국에 건재하는 한 군부에서 쿠데타란 있을 수 없어요. 설사 일으켰다 하더라도 불가능할거요.』
『그렇지만 족청계에서 박병권·김웅수·정강 중장 등이 쿠데타를 꿈꾸고 있다는데 김 신부님은 어떻게 보십니까』고 구체적인 명단까지를 들추어 가면서 찔러보았으나 그는 여전히 무관심한 태도였다.
장씨는 그 얼마 후 대구에서 올라오는 기차간에서 우연히 민주당 부여지구당원인 Y씨를 알게되었다. Y씨는 민주당 실력자였던 현석호·이석기 집을 드나드는 인물이었다.
그후 어느 날 Y씨를 서울에서 만나게되자 장씨는『족청계 쿠데타 설이 꾸준히 나돌던데요』하고 그의 반응을 살폈다. 그러나 그 또한 『그럴 리 없습니다. 현 장관에게 얘기해두겠습니다』라고 했다.
며칠 뒤 장씨를 찾은 Y씨는『현 장관을 만났는데 ○군단장 김웅수, ×사단장 정강 장군 등 족청 출신 장성의 다짐을 받았으니 쿠데타 계획은 어림없는 일』이라고 했다.
장씨는 수시로 박 소장을 만났다.
민주당 장부는 군부에 대해서는 안심하고 있다는 것이 장씨의 결론.
장씨의 역할은 민간협력자들이 전해준 얘기다. 그러나 장씨가 맡은 일은 정보나 정세판단 외에도 세밀한 분석과 판단이 필요한 일들에서 박 소장의 상담역을 했다. 장씨는 주로 종로의 향원·희다방 등을 출입하며 김종필 중령과 만나 정보활동을 계속했다.

<이주일 장군과 동창>
5·16당일 방송된 혁명공약과 선전문 등을 인쇄했던 광명인쇄소 사장 이학수씨(현 광명인쇄소·고려원양사장)의 회고.
『나는 당시 2군사령부 참모장이던 이주일 장군한테서 거사계획을 들었습니다. 이 장군과는 친척간이고 해방 전 만주에서 같은 중학교에 다니면서 친하게 알고 지낸 사이었으니깐 요. 그해3월18일 서울에 와있던 이 장군이 나를 집으로 부르더니 말문을 열더군요.

<학수나 나나 나이 40이 넘었으니 살만큼 살았다고 보네. 이젠 나라를 위해 생명을 바칠 생각은 없나>하고….

<아니 별안간 무슨 말씀입니까>하고 반문했더니 이 소장은 거사계획을 털어놓더군요.
박정희 소장·김동하 소장 등이 중심이라면서<거사당일 필요한 인쇄물을 학수가 맡아주었으면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오?>라고 합디다.
나는 단도직입적으로<이 사실을 참모총장도 알고 있습니까?>고 물었죠. 그랬더니<이미 뜻은 통해서 알고 있어. 묵인정도인데 아직 완전한 결심은 서지 않은 상태야>하더군요. 내가 협조를 약속하자 이 소장은<박 소장에게 전화를 걸어 세부적인 지시를 받도록 하게>하고 알려주더군요. 박 소장은 이 소장의 소개로 6년 전부터 친히 알고 있었지요.』
그후 이씨가 박 소장과 연락이 닿아 김종필씨 등과 활동하기까지의 상황을 이씨의 회고로 요약해보자.
『그 이튿날 평소보다 회사에 일찍 출근한 나는 박 소장 댁에 전화를 걸었다. 내 이름을 대고 박 소장을 찾았다. <오랜만이오. 그래 사업은 잘돼갑니까.><네 잘돼갑니다. 실은 이 소장께서 박 소장에게 전화를 걸라고 해서….><나도 연락을 받았소. 전화로 자세한 얘기를 할 수 없고 내일 아침9시경에 사람을 보낼 터이니 그 사람과 의논하시오. 사람은 내가 절대로 신임하는 김 중령인데 금후에 취해 주시오.>
이런 내용과 함께 박 소장은 김 중령의 인상을 소상하게 설명해 주는 것이었다.
다음날 아침9시, 선글라스를 낀 바바리코트 차림의 김 중령이 내방에 찾아왔다.

<제가 김 중령입니다.>그는 간단한 인사를 마치고 양복안주머니에서 편지한통을 꺼내 전해주었다. 김종필씨를 소개하는 편지였다.
우리 둘은 앞으로의 연락방법·전화·암호 등을 상의했다. 암호 중에는 박 소장은「박 사장」, 김 중령은「신당동 김씨」로 부르기로 했다. 나는 D데이에 일을 할 직공들을 내정해두고 거사일 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거사준비과정에서 가장 힘들었던 부분이 자금조달. 초기엔 박 소장과 이주일씨가 꾸려댔지만 무척 옹색했다.
박 소장은 대구의대 이 모 학장을 비롯해 대구출신의 및 실업가들에게 자금을 융통하려했으나 번번이 거절 당했다.
대구시절의 박 소장 단골집은 상동에 있던 청수찰. 그 무렵 박 소장은 이 단골집 주인 김태남 여사에게 30만환을 얻어 썼다.
거사자금에는 군부대의 공금도 동원되었다. 이주일 소장은 자금 때문에 고민하는 박 소장을 보다못해 어느 날 경리책임장교를 불렀다.

<내 개인적으로 필요하니 50만환만 어떻게 마련해주게. 두 달 안에 갚을 테니….>경리장교는 50만환을 마련하여 이 소장에게 주었다. 당시 자금난이 얼마나 심각했던가를 말해주는 비화다.
정보담당의 장태화씨도 자금이 문제였다. 박 소장은 제○훈련소장을 소개해주지만 실패.
박 소장은 다시 훈련소 참모장 손창규 대령 앞으로 소개장을 써주면서 계 대령은 쓸만한 사람이니 포섭여부도 살펴보라고 일렀다.
손 대령은 박 소장의 메모를 받자 두말없이 응낙했다. 장씨는 이후 납품에서 얻은 20만환 정도의 수익금으로 활동을 계속했다.
자금마련엔 김용태씨 (6∼10대의원·무임소장관)도 한몫을 거들었다. 대전에 집과 땅을 팔아 1백50만환을 친구인 김종필씨에게 전한 것.
이럴 때 거액의 자금을 던진 실업가가 남상옥씨 (현 타워호텔회장). 그는5·16직전까지8백20만환을 뒷받침했다.

<김종필 중령 보내>
남씨가 거사자금을 지원하게 된 배경을 이학수씨의 회고로 엮어보자.『남씨는 만주에서 학생시절을 보낼 때 유원식 대령과 친하게 지낸 사이였어요.
육군에서 장군파동이 일던 60년9월초, 유 대령의 소개로 남씨는 박 소장과 처음으로 만났죠. 박 소장이 육본작전참모부장으로 취임한 직후였어요.
다음해 3월20일 박 소장은 김종필 중령을 삼화빌딩 309호실의 남씨 사무실로 보냈죠. 박 소장은 거사준비가 성숙했음을 알리고<김군 편에 자금을 좀 보내주시기 바란다>라는 서신을 전했답니다. 남씨는 그 자리에서 김 중령에게 1백10만환을 전달했죠.』
그 뒤4·19 1주년 기념일을 보름 앞둔 4월4일 박 소장이 남씨를 찾아와<장도영 총장을 혁명지도자로 내세우기로 했소>라며 거사가 임박했음을 알린다. 남씨는 이 자리에서도 l백만환을 건네주었다.
자금조달과정에서 거사계획이 누설될 뻔한 위기를 맞는다. 「김덕승 사건」이 그것이다.
다음은 김덕승씨(60·전 마사회장·국일대반점 회장)의 회고.
『독립군에 있던 나는 45년8윌23일 중국 북경으로 가 광복군 특별대장을 했습니다. 광복군 내의 유일한 무장대였죠. 첩보·보안임무를 담당했습니다. 이때 편입된 박정희(1중대장)이주일(2중대장) 씨를 알게 됐습니다. 또 만군 대위로 있던 신현준씨 (후일 해병대사령관)도 합류했습니다. 이 당시 닦은 정보업무로5·16전 연행됐을 때 59시간을 버틸 수 있었구요. 중국군52경비사령부 정보과장(소좌)으로 있다가 47년12월 귀국한 뒤에도 박정희 장군과 계속 교류를 해왔습니다.
59년10월께 입니다. ○관구 사령관으로 있던 박정희 소장이 찾아와서는<늘 신세만 졌으니 오늘은 내가 저녁을 사겠다>며 삼각지에 있는 3층 요리집「중화원」으로 데려갑디다.
박 소장은<나라 돼 가는 형편을 보니 방관할 수도 없고 뭔가 해야겠다>며<잘못되는 경우는 여편네와 자식들을 부탁한다>고 하더군요. 이때부터 각오가 돼있던 모양입니다. <걱정말라>고 했죠. 관구내 화재사건으로 한참 옥신각신한 뒤 박 소장은 군수기지사령관 발령을 받았는데 나를 부르더니 부산 가서 사업이나 하랍디다. 그래서 따라 나선 게 부산서 1년반을 지내게 된 이유지요.1관구로 잠시 옮겼던 박 소장은 2군부사령관으로 발령 받자 나를 다시 대구로 오라는 겁니다.
박 소장은 여기서 진짜 거사계획을 세웠지요. 4백만∼5백만환을 꾸려댔는데 또 5백만환이 필요하다고 하길래 나는 돈이 없고 내가 잘 아는 오인환씨를 소개하겠다고 했지요.
오씨는 내가 서울남산(현 동보성자리)에 UN호텔을 지을 때의 건설업자지요. 4월께 오씨를 대구로 오게 해 내가 경영하던 요릿집「기린원」에서 박 소장·이주일 소장 등을 만나게 했습니다.

<″사기 쳤다〃 거짓말>
오씨는 5월13일까지 나에게 돈을 준다고 했습니다. 나는 13일 상오10시 박 소장에게 건네주기로 했지요. 서울로 온 내가 12일 새벽 집을 나서는데 형사 4명이 나를 지프에 싣더군요. 시경까지 끌고 간 다음 시경 뒤의 여관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김홍수 서울지검 부장검사(한청 사건지휘검사) 김덕호 시경부국장·수사과장 등 검·경의 공안관계자 12명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나를 알몸으로 만든 뒤 옷깃·바짓단까지 뜯어내면서 수색을 했지만 돈은 1천2백환 밖에 없었습니다. 김 검사는 <다 알고 있으니 불라>고 합디다. 나는<군에서 나오는 폐품을 불하 받기 위해 박 소장에게 여자와 술을 대주고 있을 뿐>이라고 잡아뗐죠. 한참 닦달을 하더니 서울역 앞 양동의 어느 건물지하실로 데려가더군요.
3명이 취조를 하면서<오인환이를 알지. 이태희 검찰총장에게 직접 보고해 장 총리까지 아는 얘긴데 거짓말하면 죽어>하며 문초를 했지만<돈이 떨어져 오에게 사기를 친 것>이라고 부인했죠. 16일 새벽이 되자 수사관이 한 명씩 없어졌는데 상오11시가 되니「사기범」이라는 딱지를 붙여 중부서 유치장으로 넘기더군요. 그런데 호적상으로는 이름이 달라 17일 하오2시나 돼서야 석방됐습니다.
늦게 안 얘기지만 육영수 여사가 돈은 안 가져오고 이상하니 가보라는 박 소장의 말을 듣고 그 동안 우리 집에 두 차례나 왔었다는 겁니다. 당국이 우리 집을 감시했더라면 다 탄로 날 뻔한 거죠.』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