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정희 “자네 무쇳덩어리야?” 술자리 버틴 박태준에 놀랐다 유료 전용
━ 대통령과도 격론 벌이며 만든 제철소 1967년 개천절에 열린 포철 기공식에 참석하지 않았던 나는 11월 8일 종합제철소 건설추진위원회 위원장에 공식 임명되었다.
-
“혁명 뒤처리 못하면 역적 돼” 67세 정구영, 37세 JP 손잡다 (34) 유료 전용
민주공화당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분이 청람(靑嵐) 정구영(鄭求瑛·1896~1978·충북 옥천 출신) 선생이다. 그는 우리나라의 ‘마지막 선비’였다. 지조를 절대 꺾지 않
-
최고회의 평균 나이는 39세…사진 한 장이 보여준 새 권력 (15) 유료 전용
1961년 5·16은 구질서의 권위와 기능을 정지했다. 그날 내가 작성해 KBS 방송으로 내보낸 포고문(4호)은 이랬다. “군사혁명위원회는 오늘 오전 7시를 기해 일체의 장면 정
-
[박용한 배틀그라운드] 전쟁터와 다를 바 없는 그곳···'투스타'도 40㎏ 짊어지고 뛴다
땅바닥에 몸을 던진다. 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날 순간 다시 튀어 오른다. 쉴 틈은 없다. 허리를 숙여 기어가고, 양손에 탄약통을 들고 뛴다. 무거운 부상병을 어깨에 메고
-
‘장면 총리 퇴진시키고 장도영 옹립’ CIA 서울 요원 또다른 쿠데타 준비
1961년엔 박정희 소장이 준비하던 5·16 말고도 또 다른 쿠데타설이 난무했다. 해병대 궐기설, 족청(族靑)계 거사설 등이다. 김포의 해병1여단에선 오정근 대대장, 조남철 부연대
-
누구나 박정희를 알지만 누구도 박정희를 모른다③
생존_찢어지게 가난한 모친, 낙태하려 마신 간장 뚫고 태어나다 운명_3군을 다스릴 관상,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똑같은 사주 욕망_일본장교·北내통 소령…긴 칼 차고 싶던 權富 지향의
-
['유신의 떡고물권력' 이후락] 그는 美CIA 스파이로 박정희 감시했다 ②
>>박정희 신도관련사진1971년 대선 당시 박정희 대통령 후보(가운데)에게 이후락 비서실장이 귀엣말을 하고 있다. 맨 오른쪽은 육영수 여사.민주당 정권 시대에 이후락 씨가 만든 정
-
[삶과 추억]'5·16' 혁명검찰부장 박창암 예비역 준장 별세
5.16 군사 쿠데타에 참여한 뒤 '민정(民政) 이양'을 주장하다 반혁명 세력으로 몰려 구속됐던 참군인 박창암(朴蒼岩) 예비역 육군 준장이 10일 오후 10시30분 별세했다. 8
-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오프 더 레코드 (33)
33. 10년만의 귀국 마릴린 먼로를 대사관 파티에 초청하겠다는 아이디어는 약소국 외교의 설움을 극복해 보고자 발버둥치던 임대사가 짜낸 일종의 고육지책(苦肉之策)이었다. 나는 당시
-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오프 더 레코드 (2)
(2) 국방대학원 강의 나는 이미 61년 초부터 쿠데타가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얘기는 듣고 있었다. 국방대학원 강의를 통해 알게 된 군인들과 술자리를 같이하면서 여러 차례 그런 느낌
-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오프 더 레코드 (1)
(1) 박정희와의 만남 1961년 4월 어느날 무교동 일식집 이학 (二鶴) .김동하 (金東河) 해병 소장이 바쁜 걸음으로 헐레벌떡 들어왔다. 이어 작은 체구에 얇은 스프링 코트를
-
[실록박정희시대]12. 만주군 인맥…5.16도왔지만 끝내 토사구팽
여순 (麗順) 사건 발생 직전인 1948년 여름 서울 안국동의 요릿집 아향 (雅香) .30대 전후 청년장교들이 모여 단합대회를 갖고 있었다. 방 가운데 길게 놓인 술상을 마주보고
-
(10)JP와 군부|개혁주도세력 JP행적에 불만|63년 군정과정서 한때 거사세도
80년 서울의 봄이 안개정국에 맴돌다 만 것은 집권세력이 구심점을 만들어내지 못한데도 원인이 있다.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은 권한은 넘겨받았지만 권력기반이 없었다. 바람직한 일은
-
실패한 도전정구영 비망록|군정연장 선언에 눈앞 캄캄
박정희의장의 민정불참선언과 김종필의 망명은 공화당을 난파선으로 만들듯했다. 그러나 공화당엔 동요가 없었다. 공화당의 주역들은 정국의 중심부에 있었다. 실상 박의장의 민정불참선언만해
-
실패한 도전정구영비망록|JP로부터 장당떠맡다
박정희의장이 민정불참의 뜻을시사한 2· 18성명의 배경은 5·18주체 내부의 권력투정이다. 박의장은 김종필의 공화당과 최고위원들 사이의 중재를 위해 최고위원 제2진을 공화당에 참여
-
(7)창당주도권다툼 가열
공화당은 위기에 마주치고 있었다. 주체들의 권력투쟁이 만들어내는 위기였다. 정구영은 투쟁의 바깥에서 한동안 방관자로 머물수밖에 없었다고했다. 깊은 내막조차 알길이 없었다고했다. 격
-
(3700)(153)국가재건 최고회의
혁명이 일단 성공을 거둔 18일 현역군인 30명과 김홍일 김동하씨등 2명의 예비역 장성을 고문으로 군사혁명위원회가 탄생됐다. 이날 하오 해병대 김윤근준장 사회로 열린 첫회의에서는
-
(152)-혁명위 구성과 8기
혁명군이 일단 서울을 점령한 5윌16일 아침 박정희소장은 5인 혁명위를 구성하고 그밑에 분과위를 두기로 하고 명단을 발표했다. 5인위는 박정희소장 김동하소장(예비역) 채명신준장 윤
-
(3690)제79화 육사 졸업생들(143)공륜단 출동 지연
박 소장이 출동독려를 위해 김포 공수단으로 떠나자 길재호(60· 평북 영변· 6, 7, 8대 의원·8기) 유승원(62·인천· 8특· 전 국회의원· 인천시장) 강상욱(55· 원산·
-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제79화 육사졸업생들(138) 거사일 최종확정
「4·19계획」과「5·12계획」이 차례로 유산됐으나 거사추진에는 큰 동요 없이 박정희소장의 일정은 다시 바빠지기 시작했다. 당시 2군 부사령관이면 그는 2군참모장 이주일장군(7특)
-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제79화 육사졸업생들(111)-「7특」과 「5·16」
5·16직후인 18일 혁명주체들은 현역장교 30명으로된 군사혁명위원회를 구성했다가 20일자로 그 명칭만을 「국가재건 최고회의」로 고쳤다. 구성원은 그대로였고 퇴역 원로군인 2명으로
-
중국인들 무자비한 한인보복살인 교민 자유 위해 보안사 설치|김홍일장군 권고따라 천신만고 끝에 귀국
해방된 만주는 무법천지였다. 우리 교민들은 중국인들에 의해 죽창으로 살해되고 가족과 농장은 불탔다. 그들은 한인들을 일본의 하수인·앞잡이로 생각하고 보복한 것이다. 세상이 이렇게
-
(10)-국군 수뇌부
해방 후 우리 국군의 수뇌부는 대체로 광복군·일본군·만주군 출신의 원로들로 구성되어 무난한 안정과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광복군 계열에서는 중국군 소장으로 광복군 참모장을 한 이
-
(3556)-제79화 육사졸업생들 (9)
우리가 2년간의 예과과정을 마치고 본과에 올라갔더니 만주군관학교에서 한인학생 8명이 편입돼 와 있었다. 만주신경군관학교 (예과) 3기로 들어갔다가 일본육사 58기로 들어온 분은 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