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00)<제79화 육사졸업생들>(153)국가재건 최고회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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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혁명이 일단 성공을 거둔 18일 현역군인 30명과 김홍일 김동하씨등 2명의 예비역 장성을 고문으로 군사혁명위원회가 탄생됐다.
이날 하오 해병대 김윤근준장 사회로 열린 첫회의에서는 장도영중장을 의장으로, 박정희소장을 부의장으로 선출했다.
이어 19일 하오3시 육본희의실에서 군사혁명위원회 제1차회의가 열렸다.
그러나 문제가 첫날부터 발생했다. 회의가 시각되자 김종필씨가 「국가재건최고회의 편성표」라는 차트를 들고 나와 브리핑을 했는데 이 명칭에 대한 이견이 분분했다.
김종필씨는 당시 최고위원도 아니고 예비역으로 혁명위원회에 나와 브리핑을 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문제를 삼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정군운동때부터 주역으로 혁명거사를 준비했고 박소장과 인척으로 총무 자금책등 혁명에 대한 공이 큰 것을 누구나 부정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5기생 문재준 박치옥대령은 『반공을 국시의 제1로 선언한 우리가 왜 하필이면 이북에서 자주 쓰는 「최고」라는 명칭을 사용하느냐』고 이의를 제기했었던 것이다.
그러나 박소장이 『지금 그런 명칭문제를 따질때가 아니니 차차 연구해 보기로하자』고 해 그대로 넘어갔던 것이다.
20일 회의에서는 14개 분과위원이 임명되었는데 8기생으로는 ▲행정=오치성대령 ▲내무=박원빈중령 ▲보사=길재호중령 ▲체신=옥창호중령 ▲법무엔 8특의 이석제중령이 각각 배치됐다.
이어 27일에는 최고위원 겸직금지로 당시 각료를 겸하고 있던 한신소장(내무장관) 정내혁소장(상공장관) 장경순준장(농림장관) 박기석대령(건설장관)등이 최고위원에서 빠졌고 김홍일외무장관이 고문직을 내놓았다.
이 자리에 김재춘대령(5기) 오정근중령(해병) 김제민중령(9기)과 8기생 김경욱중령 홍종철중령이 추가됐다.
김형욱중령은 당초 중령이하에게 최고위원자리를 5명만 배정했다고 항의를 하다 장경정준장에게서 뺨을 맞은 일까지 있었던 일로보아 중령급 장교들의 불만을 누그러뜨리자는 의도와 최고회의를 8기중심으로 구심점을 이루도록 하는 양수겹장의 포석이었다고 볼수 있다.
여기다 김동하장군이 현역으로 복귀하면서 고문에서 최고위원으로 욺겨 앉아 최고위원은 모두 32명이 됐고 8기생도 7명으로 늘어났다.
이때문에 최고회의안의 8기생 그룹은 가장 큰 덩어리가 됐다. 왜냐하면 8기생을 제외한 나머지 위원들은 3군 참모총장 해병대 사령관등 당연직과 명망있는 장성등 혁명과 무관했던 인사들이 대다수였기 때문이다. 후에 들은 애기지만 8기를 중심으로 한 혁명 주도세력들은 혁명준비 단계때부터 최고회의의 구성을 염두에 두었고 이미 기구안을 마련해 놓고 그 계획에 따라 착착 진행해가고 있었다고 한다.
반면 출동부대장인 5기생들은 이들의 계획에 밀려가는 꼴이 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장도영중장 반혁명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김종필씨는 군사혁명위원회가 구성되기 이전부터 준비작업을 맡아 44개 항목에 달하는 혁명과업 제목을 메모해 두고 있었다고 한다.
그 첫번째가 혁명위원회를 곧 국가재건 최고회의라는 명칭으로 바꾸고 입법 사법 행정 3권을 장악하는 명실공히 최고의 통치기구로 한다는 항목이 들어 있었다는 것이다.
19일의 첫 회의때 김종필씨가 최고회의 밑에 총무처 중앙정보부 재건국민운동본부등 4개의 직속기관을 둘 것을 브리핑한 것으로 보아 이미 박소장과 김종필씨간에는 혁명후의 통치구상을 끝내놓고 있는 상황이었다고도 볼수 있다.
21일에는 당면한 혁명과업 수행을 위해 국가정책을 연구케 할 목적으로 최고회의 기획위원회를 신설해 그밑에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재건 기획, 법률등 5개 분과위원회를 설치하고 위원장에 국방대학원장 함병선중장(64·군영·포철고문역임)이 임명됐다.
기획위원장 고문에는 유진오박사 최호진 이용희 김석범 오종직 서석순씨등 6명의 인사가 임명됐다.
5개분과위도 국방대학원 교관들인 대령급의 위원장 밑에 각계 인사들을 망라한 인선이 있었다.
즉 최고회의라는 공식기구 밑에 각계의 브레인을 모으는 작업이었고 이것 역시 박정희부의장-김종필씨 선에서 구상되고 결정되었다는 것이다.
이같은 공식 기구 외에 박정희 부의장과 김종필씨는 혁명을 국민운동화 시킬 목적으로 재건국민 운동본부 결성에 들어갔다.
혁명거사 전에 작성한 혁명기구표에도 이미 재건국민운동본부 설치가 포함돼 있었다는 것이다.
이 기구 창설을 담당했던 사람은 9기생 강상욱중령과 8기생 김용건중령이었다.
이 재건국민운동본부(초대본부장 유진오박사)는 후에 8기생 심이섭대령(재건국민운동본부차장)에 의해 운영되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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