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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추억]'5·16' 혁명검찰부장 박창암 예비역 준장 별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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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5.16 군사 쿠데타에 참여한 뒤 '민정(民政) 이양'을 주장하다 반혁명 세력으로 몰려 구속됐던 참군인 박창암(朴蒼岩) 예비역 육군 준장이 10일 오후 10시30분 별세했다. 82세.

함경남도 북청 태생인 고인은 중국 옌지(延吉)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사로 근무하다 광복되자 월남, 1946년에 군사영어학교에 입교했다.

그는 재학 중 특수공작을 위해 방북, 초창기 북한군 수뇌부에 침투해 활동하던 중 정체가 발각돼 평양감옥에 수감됐으나 김구(金九)선생의 평양 방문 때 가석방된 뒤 월남했다.

49년 한국군에 복귀해 중위로 임관된 고인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동해유격대장''육군특수부대장' 등을 역임하는 등 당시 불모지였던 특수부대 창설의 산파역을 맡았다. 이런 공로로 고인은 유격전 및 심리첩보전 분야의 대가로 지금도 군내에서 추앙받고 있다.

그는 육군사관학교 생도대장으로 근무하던 61년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자 사관생도들을 이끌고 혁명에 가담한 뒤 혁명검찰부장을 맡아 부정축재자 척결 등 국가기강 확립에 진력했다.

혁명검찰부장 재직 시절 예산이 남았다고 정부 역사상 최초로 반납해 화제가 되는 등 강직한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군사정권 수뇌부가 정권을 계속 장악하려 하자 "혁명의 목적은 달성되었으므로 군은 당초의 약속대로 민간인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군 본연의 임무로 돌아가야 한다"고 거듭 강조해 미운털이 박히고 말았다.

결국 고인은 63년 3월 김동하(金東河).박림항(朴林恒) 등 주로 함경북도 출신 장군 19명과 함께 반혁명 혐의로 구속되는 비운을 맞았다.

복역 1년 만에 형(刑)면제 처분으로 출옥한 고인은 초야에 묻혀 평범한 촌부생활을 시작했지만 불의를 좌시하지 못하는 성격 때문에 칩거 4년 만인 68년 사재를 털어 '자유'지를 창간하고 사회활동을 재개했다. '자유'를 2001년까지 발행하면서 고구려 고토 회복 등 민족사관 확립에도 남다른 정열을 쏟았다. 호(號)도 '만주'로 지을 정도였다.

김국헌(金國憲.육군소장) 국방부 군비통제관은 "고인은 죽음을 무릅쓴 유격전의 대가이자 군인 본연의 자세를 후배들에게 일깨워준 군인들의 영원한 스승이었다"고 회고했다.

유족으로는 박청권 육군대령.박청인 국립 한경대 교수 등 2남1녀가 있다. 빈소는 삼성서울병원, 발인은 13일 오전 10시다. 02-3410-6912.

이철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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