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오프 더 레코드 (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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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2) 국방대학원 강의

나는 이미 61년 초부터 쿠데타가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얘기는 듣고 있었다.

국방대학원 강의를 통해 알게 된 군인들과 술자리를 같이하면서 여러 차례 그런 느낌을 받았다.

그런 가운데 박정희 소장은 쿠데타를 기정사실화한 채 내게 미국의 반응부터 묻고 있었다.

어차피 朴소장이 보따리를 풀었으니 나도 거리낄 게 없었다.

나는 "미국은 쿠데타로 집권하는 새 정권의 반미 (反美) 정책 여부에 가장 신경을 쓸 것이며 국민의 지지 여부도 중요하다" 는 점을 강조했다.

바로 그런 문제만 안심할 수 있다면 미국이 쿠데타 그 자체를 문제삼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더니 朴소장은 연방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朴장군께서 정녕 쿠데타를 하시겠다면 미국의 의중을 살피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 보다는 정말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충정으로 결심해야 한다" 고 지적했다.

그러자 朴소장은 힘을 얻었다는 듯 모처럼 밝은 표정을 지었다.

그날 우리는 질펀하게 술을 마셨고 헤어지면서 다시 만날 것을 굳게 약속했다.

그로부터 한 달이 채 못된 1961년 5월 16일 아침. 난 무심코 라디오를 듣다가 쿠데타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듣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나는 무교동 일식집 이학 (二鶴)에서 만난 朴소장을 떠올렸고 그가 바로 쿠데타 주도자임을 직감했다.

바로 그날, 나는 서울에 있는 미국 친구들로부터 '미국이 쿠데타를 적극적으로 막을 것 같지 않다' 는 얘기를 듣고 한 달 전 내 예측이 들어맞았다는 확신을 가졌다.

박정희와의 인연은 내가 10년간의 유학 끝에 귀국한 1958년, 국방대학원 (國大院)에서의 강의로 시작됐다.

나는 한국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가르치는 것이 유학을 한 사람으로서의 의무요, 조국에 대한 도리라고 생각했다.

특히 터키의 케말 파샤나 이집트의 나세르 같은 인물들이 낙후된 한국 근대화 추진의 모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내 강의도 자연 그런 쪽으로 기울게 됐다.

어느날 나는 국대원 강의에서 대한민국을 '깡통 찬 국제거지' 로 비유한 적이 있었다.

'나라 꼴이 이 모양인데 군인들은 뭐하고 있나. 적과 싸워 이기는 것만이 임무의 전부는 아니다.

그저 군복만 입고 빈둥거린다면 무위도식이 아니고 뭐냐…' 내 강의는 대충 이런 식이었다.

요컨대 '군인들이 더 분발해 조국에 충성을 다해야 한다' 는 취지에서 한 말이었다.

그런데 수강생인 군인들은 이런 강의내용에 상당히 긴장하는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강의를 마친 다음날 나는 서대문 자택에서 형사들의 반갑지 않은 방문을 받았다.

이들은 '서울시경에서 나왔다' 며 자신들을 소개한 뒤 곧바로 나를 연행했다.

이유는 내가 군인들에게 쿠데타를 선동했다는 정보가 자유당 고위층에 보고됐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시경에 들어서자 최치환 (崔致煥.국회의원.경향신문 사장 역임) 국장이 나를 보더니 "왜 군인들을 상대로 쿠데타나 선동하느냐" 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내가 "그렇지 않다" 고 우기자 그는 더욱 언성을 높였다.

"李교수. 당신이 아무리 잘났어도 목숨이 두 개요? 지금 같은 난세에는 논리보다 주먹이 가까운 법이오. 이런 식으로 나오면 당신만 손해본다는 점을 명심하시오. 조용히 해요. 제발 그 잘난 체 좀 하지 말고…. " 나는 崔국장이 겉 보기와는 달리 내심으론 나를 보호해 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걸 육감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가 시키는 대로 자술서 한 장을 써 주고 즉석에서 훈방됐다.

집에 와서야 알게 됐지만 崔국장의 부인은 내 아내 (李慶淑) 와 경기여고 동창이었다.

바로 그런 관계로 崔국장은 직접 내 신원보증까지 서 주면서 나를 훈방시킨 것이었다.

아무튼 이 사건은 그 무렵 국방대학원에서 문제의 내 강의를 들었던 김동하.이주일 (李周一).윤태일 (尹泰日) 장군들과 급속히 가까워지게 된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어 준 셈이다.

글= 이동원 전 외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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