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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의 떡고물권력' 이후락] 그는 美CIA 스파이로 박정희 감시했다 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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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신도

일본 첩보원학교(나카노학교) 출신으로 영어·일어 능란한 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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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대선 당시 박정희 대통령 후보(가운데)에게 이후락 비서실장이 귀엣말을 하고 있다. 맨 오른쪽은 육영수 여사.
월간중앙민주당 정권 시대에 이후락 씨가 만든 정보조사국을 이름만 중앙정보부로 바꿔 초대 부장에 취임한 김종필 씨는 군사정권의 권력기반을 굳히기 위해 같이 거사했던 쿠데타 세력들 가운데 육사 5기를 중심으로 한 이북 출신 장교들을 숙청하는 이른바 ‘알래스카 토벌작전’을 수행하는데, 이 작전에 이후락 씨가 개입했다.

해방 직후 군부를 중심으로 떠돌던 ‘알래스카(함경도)’니 ‘하와이(전라도)’니 ‘텍사스(평안도)’니 하는 별칭은 해방 직후 미 제 24군단이 한반도에 진주하면서 붙인 각 도(道)의 작전코드명에서 유래한 것이다.

나는 이 ‘알래스카 토벌작전’이 박정희 의장의 지시 하에 김종필 중앙정보부장과 이후락 공보실장이 모의해 만든 작품이었다고 들었다. 전면에 나선 것은 매그루더 미8군 사령관의 정보참모 등을 역임한 짐 하우스맨 대령이었다.

나는 그가 미 국방부 정보국(DIA) 소속이었던 것으로 보지만, 당시 증언자들 가운데는 한국에서 오래 활동했던 그를 CIA 한국지부 책임자로 파악하는 사람이 많다. 어쨌거나 이북 출신의 군 장교들이 믿을 만한 미국인을 전면에 나서도록 주선한 것은 나카노학교에서 ‘모략공작’ 과목을 정식으로 이수했을 이후락 실장이었다.

그 시나리오에 따라 하우스맨은 함경도 출신의 박창암 혁명검찰부장을 불러 “미국으로서는 박정희와 김종필을 믿을 수 없다. 특히 사상 면에서 그렇다. 우리는 이북에서 월남한 당신을 믿으니 박정희와 김종필을 제거하라”는 미끼를 던졌다. 박정희 의장의 형(박상희)은 남로당 간부였고, 형의 딸(박영옥)은 김종필 부장의 아내였던 것이다.

박창암 검찰부장이 이 말을 흘리자 육사 5기를 중심으로 한 함경도 출신 장교들은 5·16 거사 후 경상도 출신만 요직에 기용하는 박정희 의장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터여서 곧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우스맨은 박창암 검찰부장 등 함경도 출신 장교들에게 누구를 포섭하고 어떻게 활동했는가를 매일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그의 말을 미국의 의중이라고 믿은 함경도 출신 장교들은 일일 보고서를 제출했다. 바로 이 보고서가 김종필 부장의 뒤를 이은 김재춘 정보부장에게 고스란히 넘어갔던 것이다. 김재춘 부장은 하우스맨에게서 건네 받은 명단에 따라 김동하 최고회의 외무국방위원장, 박임항 건설부 장관, 박창암 혁명검찰부장을 위시한 관련자 32명을 구속하고 1963년 3월11일 ‘군부쿠테타음모사건’을 언론에 발표했다.

이 사건에 대해 자신은 경북 출신이면서도 함경도 출신들과 어울렸던 이규광(전두환 처삼촌) 당시 국토건설단장 보좌관은 뒤에 이렇게 회고했다. “그 사건은 엄청나게 과장된 깁니더. 내가 민정에 참여하려는 박정희 의장에게 불평을 품은 사람들과 자주 만나고 조직을 구상한 것은 사실이지만 실병력을 동원할 수 없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우예 쿠데타를 합니꺼?”

결국 ‘알래스카 토벌작전’이란 5·16에 가담했던 함경도 출신 및 그들과 가까웠던 기타 지역 출신의 장교들을 토사구팽한 사건이었다. 이 작전의 성공으로 마음이 급해지면 “가가각하…!” 하고 말을 더듬는 습관이 있던 이후락 씨에 대한 박정희 의장의 신뢰도 한층 굳어졌다.

그해 10월15일 대선이 치러졌고, 제5대 대통령에 당선된 박정희 후보는 그를 초대 청와대 비서실장에 발탁했다. 이후락 씨의 나이 39세 때의 일이다. 이후 6년 동안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활동하면서 그는 세인들로부터 “정치는 이후락, 경제는 김학렬”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박 대통령을 측근에서 유능하게 보좌한다.

1969년에는 3선개헌에도 앞장섰다. 그러나 개헌안에 대한 국민투표가 끝난 지 나흘 뒤인 1969년 10월21일 비서실장에서 해임된다. 3선개헌의 1등공신이나 마찬가지인 그를 박 대통령이 김형욱 정보부장과 함께 물리친 것이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물러났다. 어떻게 나를 이렇게 대할 수 있느냐며 박 대통령에 대한 서운함을 여기저기 떠들고 다닌 김형욱 부장과는 달랐다.

3선개헌 파동에 대한 국면전환용으로 자신이 해임된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과연 해임된 지 석 달도 안 된 1970년 1월, 박 대통령은 그를 주일대사에 임명했다. 주일대사 시절 그는 항공편으로 청와대 오찬시간에 맞춰 대통령이 좋아했던 스시를 보낼 만큼 비위를 잘 맞추기도 했다.

1970년 2월20일, 주한 미 대사는 미 국무부에 이렇게 타전했다.

“3선개헌에 앞장서서 박 대통령을 도왔으나 박 대통령은 마침내 이후락을 물리치고 말았다. 그러나 이후락에 대한 박 대통령의 신임이 사라졌다는 증거는 포착되지 않고 있다…. 대부분의 한국 정치 옵서버들은 이후락이 곧 주일대사 자리를 떠나 내년(1971년) 봄에 있을 대선과 총선을 앞두고 주요 직책을 맡을 것으로 보고 있다.”

대사가 예측한 대로 이후락 씨는 10개월 후인 1970년 12월 중앙정보부장에 임명된다. 박 대통령이 그를 불러들인 것은 제7대 대선을 진두지휘하라는 의미였는데, 이에 대해 미 국무부 정보조사국이 1970년 12월28일 작성한 ‘정보노트’에는 다음과 같이 분석돼 있다.

“부패에 연루돼 한때 일본으로 보내졌으나 그에 대한 박 대통령의 신임은 여전히 두텁고, 전쟁을 방불케 할 내년 봄 선거에 대비해 이미 갑옷을 입고 무장을 끝낸 박 대통령이 내년 선거를 성공으로 이끌 수 있는 적임자로 이후락을 지목해 중앙정보부장에 임명한 것으로 평가된다.”

1971년의 대선에서 박정희 후보는 90만 표 차로 야당의 김대중 후보를 눌렀다. 선거가 끝난 뒤 김대중 후보는 “나는 박정희에게 패한 것이 아니라 이후락에게 졌다”고 했는데, 이는 당시 관권·금권선거의 책임자였던 이후락 부장을 비꼰 말이기도 했다.

나카노 시대의 꿈이었을지도 모를 정보의 최고책임자 자리에서 이후락 부장이 행한 일은 여러 가지였으나, 그 가운데서 손꼽을 만한 일은 역시 10월 유신과 7·4남북공동성명일 것이다.

5·16 직후 “남에는 박정희요, 북에는 김일성”의 시대를 열어야 한다면서 10여 년 뒤의 영구집권 청사진까지 박정희 장군에게 제시했던 사람은 뒤에 내무장관을 지내다 의문사한 엄민영 씨였다고 들었는데, 정작 이 시나리오를 10월 유신의 이름으로 진두지휘한 것은 이후락 부장이었다.

이 무렵의 미 국무부 문서에는 이후락 부장이 ‘박정희 신도’라고 표기돼 있는데, 그만큼 충성을 바쳐 악역을 마다하지 않았다는 뜻일 것이다. 하비브 주한 미 대사가 당시 선포된 비상사태가 얼마나 지속될 것인가 물으니 이후락 부장은 “무한정”이라고 대답한 것으로 국무부 문서에 기록돼 있다. 영구집권 의도가 분명했던 것이다.

글 강준식 작가 [arumdhau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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