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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창당주도권다툼 가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공화당은 위기에 마주치고 있었다.
주체들의 권력투쟁이 만들어내는 위기였다.
정구영은 투쟁의 바깥에서 한동안 방관자로 머물수밖에 없었다고했다.
깊은 내막조차 알길이 없었다고했다.
격동이 주체들 내부에서 들끓고 있었다.
이른바 워커힐의 소동이 있은뒤인 1월4일 김종필은 반대파의 리더 김동하최고위원과 단독으로 만나 담판했다.
1월6일엔 최고회의 전체회의도 열었다.
박의장은 분쟁 수습 방법으로 반김라인의 김동하·김재춘·오정근·강상욱 네 최고위원을 공화당발기위원회에 참여하도록 했다.
그랬지만 들어가 보고 짜여진 조직의 벽이 두껍다는것을 실감했던 모양이다.
그들은 곧바로 발기인 대열을 떠나버렸다.
그들은△사전조직에는 사상적으로 불순한자들이 끼여있다 △사전조직에는 불순한 자금이 사용되었다 △혁명주체를 대우하는 자세가 되어있지 않다는 세가지를 공화당 거부의 이유로 내걸있다.

<김종필추방 주장>
그들은 그들 주장을 뒷받침하는 자료를 수집, 박정희최고회의의장에게 들이밀었다. <이런 정당을 앞세워 민정을 위한 선거에나서봐야 결과는 변하지 않느냐>고 박의장에게 들이댔다.
그들은 사전조직을 백지화하고 김종필을 공직에서 추방하라고 했다.
정구영은 그런 풍랑속에서 김종필편에섰던 사연을 이렇게 설명했다.
『그때 제일 문제된것이 4대의혹사건이야. 그런데 그 사건에 대해 내나름으로 한가지 짐작한게있어. 그때 내가 듣기로는 이사람들이 주식시장에서 돈을 벌었다는거야. 증권파동이지. 내가 어떻게 힌트를 얻었는가하면 내가 인하공대 이사장을 1년남짓 맡아본 일이 있었어. 인하공대는 이승만박사가 주재해서 된 대학아냐. 그런데 4·19후에 죽은 이기붕의 이사장직을 대행하던 최승만을 이승만의 괴뢰다 해가지고 해임했어. 그때는 재판소에서 임시이사진을선출했는데 내가 이사장을 맡게됐어. 그래 거기 일할때인데 윤응상이가 나를 찾아왔어. 윤은 주식상인이지. 지금도 주식계에서는 명물이야. 이 사람이 나가서 주식을 샀다하면 주가가 올라가고 팔았다하면 뚝 떨어지고 할 때야. 이사람이 찾아와서, 돈5억원을 인하대학에 기부하겠다는 거야. 그때 대학사정이 어려울때여서 기꺼이 받아들였어. 그랬는데 내가 해외여행중에 윤이 기부를 취소하고 돈을 되찾아 갔다는거야. 그얘기를 하자면 장황해. 아뭏든 그때 재정담당 이사 길모가 나중에 나한데<도저히 제힘으로는 반환안할수 없었읍니다. 그점 양해해 주십시오>그러는거야. 나도 곡절을 알아보고 체념을 했어. 최고회의에서 회수를 한것과마 찬가지 내용이라면 배임이니 해댔자 사람만 다치고, 그얼마뒤 나도 해임됐지만….
나중에 들으니까 윤응상은 혁명주체들과 결탁해서 주식장사를했다는거야. 그래갖고 돈을 벌였는데 그중 5억정도는 인하공대에 내도 좋겠다 생각했다가 뒤에서 조종하는 혁명주체들이 그러면 안된다고 해서 취소한 모양이야. 결국 그 5억이 정치자금화한것이 아닌가…내 추측이지.
소위 4대의혹사건이라는 것이 정치자금 연출을 위해서 그런것아니냐. 그래서 그것이 법률상으로 용인못할 점도 있고 용인될점도있고 여러가지로 미묘하지만 그것은 노터치하자, 내가 말하자면 거기에 편승한거지.
그점 인정해. 창당과정에 또하나의 문제는 주체들의 내분이야. 최고회의 멤버들, 김동하 그사람들이지.
민주공화당에 발기인으로 참여를 했다가 불과 4일만에 전부 퇴진을 했어.<그 사람들 까닭없이 불평을 하고 안나온다>고 김종필군은 막연하게 말하는데 며칠후에 알아보니까 김종필에 대한 반발이야.<이건 김종필 개인의 당이지 혁명주체의 당이 아니다. 우리가 들어가서 당을 해야지 민간인들이한다면 무엇때문에 혁명을 했느냐>들어와서 헤게모니 잡기는 틀렸고 그러니 참여할수 없다 그런거야.
그러나 누구도 노골적으로 나한테 그런얘기를 한적은 없어. 내가 육감으로 판단한것은 권력투쟁이야. 국가를 위한다는 것보다는 개인의 이해…실권을 잡아야겠는데 김종필이가 마음대로 흔드는것이니까 못하겠다는 거지.
그래 내맘속으로 김종필군을 동정했어. 나로서도 불쾌했고….
정당을 발족해서 같이하면 됐지 정당이 처음부터 주인이 있는것도 아니겠고 발족해가지고 민주주의에 의거해서 결정되는 것이지‥ 그런생각이었지만 노골적으로 얘기할수는 없고 또 그런입장도 아니고 방관만 했는데….

<한동안 방관 계속>
그 얼마뒤 최고회의하고 공화당창당관계자 핵심들하고 지금 국제호텔홀에 모여앉아서 2시간 가까이 토론한 일이 있어. 그토록 석상에서 혁명주체들이 한결같이 공화당의 현재의 창당을 승인할수 없다는거야. 한 장군출신 이종근이지 아마, 난 그 사람으로 기억해. 그 사람이 일어서서 아주 강경하게 주장했어. 노골적으로 이래. <혁명을, 우리가 목숨을 걸고 조국의 혁신을 위해 생명을 혁명을 해가지고 여기까지 왔는데 우리는 참여도 못하고 물러난다는것은 결단코 용인할 없다>그렇게 소리를 질러. 모두들 목소리가 높고 흥분들을 하고있어.
나는 시종일관 통 말을 않다가 맨끝에 일어서서 한마디 했지.<여러분들은 생명을 걸고 혁명을 했다고하지만 우리는 혁명한것을 옳다고 생각지 않소. 또 혁명의 전반기 1년은 여러분이 공약한것 일부는 실천을 했어. 질서확립·깡패소탕, 이런것 좋은 성과를 얻었다고 봐. 그렇지만 후반기 실정이 많았어요. 여러분들은 이를 시행착오라 하지만 어쨌든 많아. 수행된 기정사실로 시인하고 혁명주체 세력들과 같이 여기참여해서 신당을 조직한다고 나선 것… 지난 2년동안 정치에도 참여못했으면서도 여러분들이 수행한 책임을 연대책임을 지고서 여기에 가담했다는 사실을 왜 여러분은 눈감으려 하느냐. 창당하는데 참여하는 우리는혁명의 진다는 결의다. 과오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과오까지도 함께 지겠다는 우리들의 입장을 전혀 이해못하겠다는 것이냐.>내가 이런말을 하니까 자리가 조용해졌어. 그러나 그때 그런 이론가지고 되는것은 아니야. 아무런 결론이 안나 결국 결론도 없이 논쟁만 하다가 헤어진거야.

<달갑잖게 여긴 미국>
우리는 권력투쟁은 최고회의쪽의 일이다, 그렇게 제쳐놓고 밀고갔지. 우여곡절을 거쳐 1월20일경엔 창당준비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위원장엔 김종필씨, 내가 부위원장, 이렇게 되었어. 그랬는데 미국에서 신당조직에대해 달갑지않게 생각한다는 뉴스가 들어와, 그때 김종필씨가 민족적민주주의라는 용어를썼어. 미국측에서 이게 환영할바가 못된다 그런 생각을 한것아닌가 추측을 했지. 그때가 춘궁기에 접어들때야. 1월하순경이니까. 미대사관에서 잉여농산물 도입을 중지한다는거야. 혁명정부로선 춘궁기에 밀가루를 얻지못하면 곤란한 입장에 빠지는데…. 그래 어느 저녁이야. 김종필군이 담판하러가고 우린 기다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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