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3685> 제79화 육사졸업생들(138) 거사일 최종확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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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4·19계획」과「5·12계획」이 차례로 유산됐으나 거사추진에는 큰 동요 없이 박정희소장의 일정은 다시 바빠지기 시작했다.
당시 2군 부사령관이면 그는 2군참모장 이주일장군(7특)과 의논하여 5월l6일을 D데이로 잠정합의하고 상경하여 5월12일 L-19기편으로 5사 단장 채명신준장을 찾아갔다.
박소장은 채장군에게 그간의 사정을 설명한후 거사일시가 박두했음을 전하면서 행동이 개시되면 5사단이 지원한다는 약속을 받고 그날로 서울로 돌아왔다.
박장군은「경복」이라는 주점에서 당시 예편돼 있던 김종비씨와 옥창호·김형욱·오치성·김동환 (이상 8기)·이석제·유승원씨등을 불러 거사일을 5월16일로 이주일장군과 잠정합의하고 왔음을 밝혔다. 약간의 논란 끝에 D데이로 그대로 확정했다.
5월16일을 거사일로 정한 이유는 14일이 일요일이어서 정부관료들이 주말여행을 가고 부대장병들도 외출하기때문에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또 5월15일은 장면총리가 l군 창설 기념에 참석하기 때문에 그가l군을 지휘하여 거사을 저지할 수도있어 장총리가 서울로 돌아온 직후이고 화요일인 16일이 좋다는 것이었다.
박소장은 다시 해병대 동원을 책임맡은 김동하장군 (당시 예비역 소장)을 그의 집으로 찾아가 역시 거사시간과 제반 계획을 알렸다.
그날 밤 10시에는 서울 북창동에 있는 왜식집「남강」에서 이미 연락해놓은 송찬호준장과 박치옥·김재춘대령을 만났다.
그런데 그 음식점에서 서울지구 방첩대장 이철희준장 (2기) 과 506방첩대장 이희영대령등과 마주치게 되어 한때매는 그들의 거사계획이 탄로나는 것이 아니냐 하고 걱정했었는데 무사히 넘어갔다는 것이다.
박소장은 송찬호준장 등에게 16일이 최종 거사일임을 전하고 구체적인 실천 계획을 마련했다. 즉, 행동개시는 l5일 밤12시로 하고 3시간후인 16일 새벽 3시에는 모든 목표물을 점령한다는 것이었다.
또 행동개시에 앞서 15일 밤12시까지 핵심멤버 전원이 영등포에 있는6관구사령부 참모장 (김재춘대령) 실에 집합하여 박정희소장으로부터 최총 지시를 받고 각 행동대의 출동을 독려기로 했다.
행동대 병력은 30사단과 33사단에서 각 l개대대, 공수단에서 1개대대. l군사령부 예하 6군단 포병단에서 5개대대, 해병여단에서 1개대대를 출동시키기로 했다.
이튿날인 13일밤 약수동 김종락씨(김종필씨 형·63·부여·코리아타코마회장) 집에 박소장 주재로 핵심멤버들이 다시 모여 혁명군 진주와 병행될 임무를 결정했다.
즉,정부요인 체포반=박종규소령(53·경남창원·전청와대경호실장) 길재호·김형욱·김성룡중령, 오치성대령▲포고문각성 반포반=김종필(예편) 이낙선소령 (56·경북안동·전건설장관) ▲보도·방송반=이석제중령▲가두선전반=유승원대령등이다. 다음날 아침10시 핵심멤버들은 약수동 김종락씨집에 다시모였다.,
5월16일 0시에 혁명군은 행동을 개시해 「봉화작전」이라고 명명한 위장된 비상훈련을 실시하여 새벽3시까지 계획된 목표물을 점령한다는 본래 계획을 최종확인했다. 동원될 행동대의 지휘관과 참모도 확정지었다.
즉, ▲해병대=김윤근준장(여단장) 오정근중령 (대대장) 조남철중령 (부연대장) ▲제l공수단=박치옥대령(단장)김제민중령(대대장) 차치철대위 (중대장)▲30예비사단=이갑영대령(참모장)박상훈대령 (부사단장) 이백일중령 (작전참모)▲33예비사단=이병엽대령(연대장)오학진중령 (작전참모) ▲6군단포병단=문재준대령 (포병사령관) 홍종철대령(군단작전참모) 신윤창·백태하·구자춘·정오경·김인화중령등 5개대대장▲육군본부사령=장수영중령▲6관구사령부=김재춘대령 (참모장) 박원빈중령(작전참모)등으로 정했다.
그리고 각부대의 점령목표도 확정했다.
▲제1공수단은 장면총리가 묵고 있는 반도호텔과 중앙청·국회의사당등 정치중심기관을 점령하고 일부는 요인체포를 담당하며▲해병대는 내무부·치안국·시경▲33사단은 방송국·마포형무소▲30사단은 청와대·서대문형무소·중앙청▲6군단포병단은 육본에 집결, 예비대를 맡는것 등으로 되어있었다.
최종적인 작전모의가 끝나자 박정희장군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D일H시는 변동이 없다. 최후의 1인까지라도 싸워서 혁명을 성공으로 이끌어야한다』는 요지의 격려사를 했다.
이때 김종필씨는 모인 사람들에게『최후가 될지 모르니 가족에게 양식이라도 마련해 주자』며 혁명자금중 남은 돈으로 1인당 1만원씩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성공을 다짐하는 마지막 건배를 하고 각각 자신들의 임무를 찾아 해산했다. 아직 가난하지만 민주당 치하에서 자유를 만끽하던 시민들이 봄의 행락에 들떠 있던 5월14일 화창한 일요일의 일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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