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오프 더 레코드 (1)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4면

(1) 박정희와의 만남

1961년 4월 어느날 무교동 일식집 이학 (二鶴) .김동하 (金東河) 해병 소장이 바쁜 걸음으로 헐레벌떡 들어왔다.

이어 작은 체구에 얇은 스프링 코트를 걸쳐 입은 한 40대 남자가 뒤를 따랐다.

나를 보자 金장군은 "늦어서 미안하다" 고 말한 뒤 박정희 (朴正熙) 장군을 소개했다.

朴장군도 "반갑소, 李박사" 하며 내게 먼저 악수를 청했다.

날카로운 눈매가 인상적이었다.

그는 앉자마자 맥주컵에 정종을 가득 채우더니 단숨에 들이켰다.

그리고는 이내 침묵이었다.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허공만 바라볼 뿐 도무지 말이 없었다.

그러기를 무려 한 시간여. 답답하다 못해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이게 뭐야! 사람을 보자고 했으면 뭐든 얘기를 해야지' .나는 은근히 화가 났다.

金장군은 국방대학원 시절 내 강의를 들은 이후 가까워진 사이였다.

어색한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金장군에게 더러 농담을 건네보기도 했지만 朴장군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계속 술만 들이키며 담배를 피우는 바람에 방안은 온통 연기로 가득했다.

그러던 중 마침내 朴소장의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李박사, 내가 쿠데타를 하면 미국이 어떻게 나올 것 같소?"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순간 황당하다는 느낌 말고는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야말로 기습적인 질문이었다.

너무 놀란 나머지 나는 "지금 쿠데타라고 하셨습니까?" 라며 재차 확인해 봤다.

하지만 결코 실언 (失言) 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초면인 나에게 왜 천기 (天機) 를 누설하는 것일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언뜻 짚이는 게 있었다.

'혹시 나의 국방대학원 강의내용을 전해 들은 건 아닐까. 그래 맞아. 바로 그거야' .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정색을 하며 이렇게 말했다.

"朴장군, 장면 (張勉) 정권이 유약하긴 하지만 1년도 채 안됐습니다. 시기적으로 너무 이르지 않겠습니까. 이 정권이 과연 어떻게 하는지 좀더 지켜본 다음에 해야 '정권욕 때문' 이라는 비난을…. " 내 얘기가 '쿠데타 시기상조론' 쪽으로 나아간다고 생각했는지 朴장군은 "李박사, 그렇지 않소" 하며 내 말을 중간에서 가로챘다.

그러면서 "그 문제는 내가 나중에 설명할테니 우선 대답부터 하소!" 하며 다그치는 것이었다.

나는 생각을 정리하느라 담배를 한대 피워 물었다.

글= 이동원 의원

◇ 이동원은 누구인가

올해 나이 73세인 이동원 (李東元) 의 현 직함은 국민회의 소속 전국구 의원이자 중앙당 상임고문이다.

그러나 40대 이후 세대들에게는 '60년대초 한국외교의 활로를 개척했던 30대 젊은 장관' 으로서의 이미지가 더욱 강하게 남아 있다.

65년 한.일협정 조인과 국군의 월남파병, 국내 건설업체들의 중동 (中東) 진출 등은 그의 패기가 일궈낸 '한국외교의 개척사' 로 기록될 수 있다.

5.16 이듬해 청와대 비서실장직을 시작으로 ▶태국 대사 ▶최연소 외무장관 ▶7.8대 국회의원, 정우회 (政友會) 총재 ▶국회 외무위원장 ▶스위스 대사 ▶10대 국회의원 등을 역임하는 동안 그는 역대 정권들로부터 자신의 능력을 꾸준히 검증받아 왔다.

그는 일찍이 중학 때부터 반일운동에 앞장선 학생운동의 원조 세대다.

연세대 학생회장 시절에는 반탁운동을 전개, '고려대 이철승 (李哲承)' 과 쌍벽을 이루기도 했다.

오늘부터 연재되는 '오프 더 레코드' (off the record: '非報道' 를 뜻하는 언론용어) 는 '영원한 열혈청년' 이동원이 걸어 온 역사의 뒷얘기들이다.

그는 자연인으로서도 파란만장한 삶의 궤적 (軌跡) 을 그려 온 흔치 않은 인물이다.

함남 북청 (北靑) 출신의 한 소년이 해방과 전쟁.분단.근대화로 이어지는 격랑의 물결을 어떻게 헤쳐 왔는지 생생하게 들려 줄 것이다.

얘기는 박정희와의 만남으로부터 시작된다.

김성진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