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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박정희를 알지만 누구도 박정희를 모른다③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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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생존_찢어지게 가난한 모친, 낙태하려 마신 간장 뚫고 태어나다
운명_3군을 다스릴 관상,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똑같은 사주
욕망_일본장교·北내통 소령…긴 칼 차고 싶던 權富 지향의 나폴레옹
사랑_남로당 체포된 뒤 “널 사랑해서 도망 못 가겠다” 애인에게 편지
야심_이승만 제거 계획 등 3번의 쿠데타 실패 후 詩 읊으며 5·16 구상
열정_경제개발·수출드라이브·하면 된다…근대화와 軍隊化
소박_12·12 때 시신엔 허름한 세이코시계, 낡은 넥타이 핀, 해진 허리띠

박정희와 건국동맹

이 시기 박정희의 행적에 대해서는 상반된 주장이 있었다. “독립군을 토벌하러 다녔다”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문명자,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 1999/전재호, <반동적 근대주의자 박정희>, 2000), 여운형(呂運亨)의 건국동맹 만주분맹과 연계하여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했다”는 주장도 있다.(정재경)

그러나 박정희가 배속되었던 동만주의 열하성 지역에는 1944년 7월 시점으로 독립군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독립군을 사냥하러 다녔다”는 비난은 원천적으로 성립되지 않는다.

다만 팔로군과의 접전은 있었다. 이에 대해 박정희의 동기생이었던 중국인 고경인(高慶印)은 “1944년 7월 하순경부터 8월 초순경까지 보름간에 걸쳐 일본군과 합동으로 팔로군 대토벌작전이 있었는데, 8단에서는 2개 대대가 참가했습니다. 박정희는 부관이 되기 전 2∼3개월간 제2중대 소속 소대장으로 있으면서 이 작전에 참가했지요. 그러나 작전에는 참가했어도 그의 부대가 팔로군과 교전한 적은 없는 것으로 압니다”라고 증언했다.(정운현, <군인 박정희>, 2004)

한편 건국동맹과 연계하여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했다는 설은 만주분맹의 군사책임자였던 만주군 대위 박승환(朴承煥)이 그 해 국치일인 8월 29일을 기점으로 국내 진공을 하기 위해 만주에 있던 조선 출신 군인들을 많이 포섭했던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다.(이만규, <여운형투쟁사>, 1946/송남헌, <해방3년사>, 1985)

박정희의 친일 논란을 일거에 잠재울 수 있는 ‘건국동맹과의 연계설’에 대해 한 연구자는 그가 해방 직후 봉천(선양)을 거쳐 국내로 돌아올 수 있었음에도 베이징 쪽의 우회로를 택한 것을 보면 “건국동맹 만주분맹과 무관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라고 지적했다.(전인권, <박정희 평전>, 2006)

여러 정황으로 보면 박승환 쪽에서 그에게 접촉해왔을 개연성이 있지만 과연 박정희가 그들 비밀결사에 가담했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일본 패망에 따라 박정희가 속한 만주군 제8단은 험한 산길을 걸어 8월 17일 흥륭에 도착, 국민당 정부에 투항한 뒤 무장해제됐다. 소속 부대가 없어진 박정희는 9월 21일 동료들과 함께 베이징 쪽으로 갔다.

그리고 거기에서 광복군 제3지대 김학규(金學奎) 부대에 들어가 제2중대장이 되었다. 그러나 남한에 진주한 미군정이 광복군의 존재 자체를 인정해주지 않는 바람에 광복군으로 지낸 중국에서의 10개월은 허사가 되고 말았다. 그는 간신히 미 해군 수송함을 얻어 타고 1946년 5월 8일 부산항에 도착했다.

빈털터리로 돌아온 그를 고향의 가족도 반기는 눈치가 아니었다. 형 박상희(朴相熙)는 “그냥 선생질이나 하면 좋았을 걸 괜히 고집대로 했다가 거지가 되어 돌아오지 않았느냐?”고 면박을 주었다.(정재경) 이로 보면 박정희가 만주에서 건국동맹에 관계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여운형계의 박상희는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 구미지부장으로 활동해왔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고향에서 넉 달간 휴식을 취하다가 1946년 9월 24일 조선경비사관학교 2기생으로 입학한다. 동기생들은 그보다 8∼9세나 어렸다. 심지어 그가 속한 생도대의 중대장조차 일본육사 3년 후배였다. 그러나 그는 불평 한 마디 하지 않고 꼿꼿한 몸가짐으로 대열의 맨 끝을 따라다녔다. 나이 어린 동기들과 구보를 하는 데도 그는 ‘목숨을 거는’ 심정으로 했다.

이윽고 조선경비사관학교를 졸업한 박정희는 1947년 2월 소위로 임관하여 조선경비대 제8연대에 배속되었고, 그 해 9월 중위를 거치지 않고 바로 대위로 승진하여 조선경비사관학교 중대장이 되었다. 여기에서 그는 훗날 거사의 동조세력이 될 5기생에게 전술학을 가르치다 1948년 11월 11일 전격 구속된다.

박정희와 남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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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 일가족이 가족사진을 찍기 위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박정희의 남로당 사건은 훗날 5대 대선에 출마한 윤보선(尹潽善) 후보가 사상 논쟁을 일으키면서 일반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이다. 당초 이 사건은 1948년 10월 15일 제주도의 ‘공비토벌 작전’에 투입하기 위해 대기 중이던 여수 주둔 육군 제14연대에서 일부 세력이 반란을 일으켜 20여 명의 장교를 사살하고 여수를 점령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러자 순천에 파견되었던 2개 중대도 동조반란을 일으켜 순천을 점령했다. 이어 반란세력과 회복세력 사이에 교전이 일어나 여수에서 1700명의 사상자와 9800명의 이재민이 발생했고, 순천에서도 400여 명의 인명 피해가 났다.

이에 크게 놀란 군 당국은 여수·순천지구의 군인 3000여 명을 수사, 군 내부에 침투해 있던 남로당 계열의 적색분자 150여 명을 색출해냈다. 여기에서 군 수사당국은 육군사관학교로까지 범위를 넓혀 수사를 전개해나가는 과정에서 박정희 소령이 남로당 군사부의 고위 간부임을 밝혀냈다.

그 해 11월 11일은 육사 7기의 졸업식 날이었다. 여순사건 관련자 토벌 때문에 광주로 따라 내려갔다가 졸업식에 참가하기 위해 귀경한 박정희는 바로 그날 수사당국에 연행되었다. 1000여 명에 달하는 숙군(肅軍) 피의자들과 함께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박정희는 몇 차례 전기고문을 받기도 했으나 어떤 시점부터는 순순히 자술서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수사를 총괄했던 육군본부 정보국 특무과의 김안일(金安一) 소령은 당시 박정희가 남로당에 가입하게 된 동기에 대해 형 박상희가 “대구폭동 때 경찰 총에 맞아 죽었는데 집에 내려가 보니 그 유족을 남로당 군사부 책임자인 이재복(李在福)이 잘 보살펴주었기 때문”이었다고 자술서에 쓰여 있더라면서 “박정희는 자신이 알고 있는 남로당 조직의 명단을 죄다 털어놓았다.

남로당 조직도상으로는 상당히 중요한 자리에 있었으나 활동한 흔적은 전혀 없었다. 다만 동료들과 함께 술을 자주 먹었을 뿐이다. 그는 순전히 인간관계에 얽혀 남로당이 되어 있었다. 자술서를 읽어보니 그는 분명 이념적 공산주의자는 아니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정재경)고 증언했다.

김안일은 이 문제를 당시 육군본부 정보국장 백선엽(白善燁) 대령에게 가지고 가 “국장님에게 꼭 할 말이 있다고 간청하니 박정희 소령을 한 번 면담해주십시오”라고 청했다. 이후 김안일은 박정희를 정보국장실로 데려왔는데 이때의 일을 백선엽은 이렇게 적었다.
“박 소령은 묵묵히 앉아 있다가 입을 열었다.

‘나를 한 번 도와주실 수 없겠습니까?’ 작업복 차림의 그는 측은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면담 도중 전혀 비굴하지 않고 시종 의연한 자세를 잃지 않았다. 평소 그의 인품에 대해서는 약간 알고 있었으나 어려운 처지에도 침착한 그의 태도가 일순 나를 감동시켰다. ‘도와드리지요.’ 참으로 무심결에 이러한 대답이 나의 입에서 흘러나왔다.”(백선엽, <군과 나>, 1989)

이후 백선엽·정일권·원용덕·김일환·김백일 등 만군(滿軍) 인맥의 구명운동에 힘입어 박정희는 그 해 12월 10일 구속수사 한 달 만에 풀려나게 됐다.

박정희와 관상

당시 숙군 수사에서 살아남은 것은 그 한 사람뿐이었다. 기적이라면 기적이었다. 여기에서 나는 백선엽이 감동을 받았다고 묘사한 박정희의 의연함에 주목한다. 의연한 척했던 것이 아니다. 연기는 사람을 감동시키지 못한다. “내 운이 여기까지밖에 안 되면 여기에서 죽는 거고, 아니면 산다”는 식의 의연한 태도는 타고난 그릇의 크기에서 온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의연함과 관련해서는 만주군관학교 예과 2년 때의 일화를 하나 소개하고 싶다.

1941년 가을의 어느 휴일, 박정희는 동기생 이병주(李炳胄)·이상진(李尙振)과 함께 신경(창춘)의 구 시가지를 거닐다 길거리에서 우연히 관상을 보게 되었다. 박정희의 얼굴을 흘깃 본 60대의 중국인 관상쟁이는 “三軍叱咤之上將(삼군질타지상장) 治天下之大頭領(치천하지대두령)”이란 붓글씨를 써주어 함께 간 친구들을 놀라게 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3군 호령의 상장에 천하를 다스릴 우두머리의 상”이란 뜻이다.(정영진, <청년 박정희>, 1998) 봉황상이라 보는 이도 있고, 그의 목소리에 권(權)이 있다고 보는 이도 있다. 물론 관상이니 사주니 하는 것은 허황된 것일 수도 있지만 적어도 당사자의 심리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에서 박정희의 의연함과 무관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같은 맥락에서 관상 이야기는 왜 그가 남로당의 조직명단을 순순히 털어놓았을까 하는 문제를 해석하는 데도 하나의 단서를 제공한다. 피상적으로 보면 만주군→독립군→국군→남로당→전향이라는 기회주의적 행보를 해온 것처럼 보이지만, 다수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는 불합리한 현실을 바꾸어야 하는데 그 현실을 바꾸기 위해 힘을 가져야 한다는 노선에서 그는 한 발자국도 벗어난 일이 없었던 것이다.

이 행보는 그가 나폴레옹을 숭배하고, 긴 칼을 차고 싶어 만주로 갔던 것과 같은 선상에 놓여 있다. 다시 말해, 그는 처음부터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고 공산주의자가 될 수도 없는 사람이었다. 이 점에서 “가난을 비롯한 사회의 부조리를 해결하는 그의 아이디어는 언제나 엘리트주의적이며 하향식이었다”(전인권)는 지적을 참조해볼 필요가 있다.

그는 시류적인 이념을 따른 것이 아니라 힘을 가진 쪽의 정치노선을 택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심리의 기저에는 “3군을 호령하고 천하를 다스릴 우두머리가 될 팔자를 타고났다”는 자기 확신 같은 것이 자리 잡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남로당 조직명단을 불게 된 배경에 대해 조금 색다른 견해를 제시한 책도 있다.

여기에 보면 박정희와 함께 살았던 한 여인이 박정희 체포 직후의 정황을 다음과 같이 언급한 것으로 되어 있다. “나이는 어리고 의지할 데가 없는 저로서는… 이북에서 그게 싫어 왔는데 빨갱이 마누라라니. 얼마 후 김창룡(金昌龍)이가 찾아와서 경위를 설명해주었습니다. 미스터 박의 메모도 전해주었습니다.

‘미안해 어쩔 줄 모르겠다. 이것 하나만 믿어주라. 육사 7기생 졸업식에 간다고 면도를 하고 아침에 국방부로 출근하니 어떤 사람이 귀띔해주더라. 내가 얼마든지 차 타고 달아날 수 있었는데 현란이를 사랑하기 때문에 안 갔다. 이것이 나에게 얼마나 불리한 것인지 아는가.’”(조갑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1998)

좁혀오는 수사망을 피하지 않은 박정희가 구속 후 남로당 조직을 불게 된 동기가 실은 같이 살았던 이 미모의 동거녀를 잃고 싶지 않아서였다는 것이다.

박정희와 결혼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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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의장(오른쪽)이 정상회담에 들어가기 전 백악관 뜰에서 케네디 대통령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과묵하고 잘 웃지 않는 박정희의 얼굴에는 어딘가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전체적으로 보아 그의 결혼생활이 행복했다고 평하기는 어렵다.

그가 애착을 느꼈던 미모의 동거녀 이름은 이현란(李現蘭)이었다. 어떤 자료에 보면 이성희(李聖姬)라고도 기재되어 있는 이현란은 원래 원산 루시여고를 졸업한 뒤 단신으로 월남, 이화여대 아동교육학과 1학년에 재학 중 여고 동창 고금옥의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박정희 대위를 처음 만났다.

이후 박정희는 함남 출신의 사관학교 동기 이효(李曉) 대위에게 8살 연하였던 이현란과의 만남을 부탁했고, 이후 그녀와 1948년 초 약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여름부터 같이 살다가 그 해 11월 11일 느닷없이 구속된 것이었다. 박정희는 늘씬하고 이국적 용모를 지닌 미인 아내를 잃게 될까봐 애절한 고백을 적은 쪽지를 수사 실무담당자 김창룡을 통해 이현란에게 전달했다.

그러나 박정희에게 꿈의 여인이었던 그녀는 ‘빨갱이가 싫어 월남했는데 빨갱이 마누라’가 되어 버린 것, 그 무렵 박정희의 전처와 딸의 존재를 알게 된 것, 그리고 수사에서 풀려나기는 했지만 그 후의 군법회의에서 군적이 박탈됨으로써 장래가 불투명해진 것 등 정나미가 떨어져 1950년 2월 6일 자기를 찾지 말라는 쪽지를 남긴 채 박정희의 곁을 떠났다.

당시 방첩대 본부장으로 박정희를 가까이에서 관찰할 수 있었던 한웅진(韓雄震) 중령은 이렇게 증언했다.

“박정희는 비참한 모습이었습니다. 술에 취해 내 방에 기어 들어와서는 울기도 하고 잠을 못 이루면서 고민도 많이 했습니다. 나한테 하소연을 하다가 흐느끼고, 그러다가 밤이 늦어 취한 몸으로 아무도 없는 관사를 향해 돌아가는 뒷모습을 잊을 수 없습니다. 생활은 어렵고, 아내는 가출하고, 어머니는 충격으로 죽고, 친구들은 외면하고, 장래의 희망은 사라지고…. 그분의 인생에서 가장 어두운 시절이었지요.”(조갑제)

아픔을 주고 떠난 이현란 이전에 그에게는 이미 결혼한 첫 부인이 있었다. 대구사범 5년 때 부친 박성빈이 당신 생전에 손자를 보겠다며 데려온 이웃 선산 읍내의 부잣집 딸 김호남(金浩南)이 바로 그녀였다. 훤칠하게 잘생긴 처녀였다는데 처음부터 마음 내켜하지 않았던 박정희는 1937년 첫딸(박재옥)을 낳은 뒤에도 냉랭한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아버지가 강제로 시킨 결혼이었던 데다 2년제 간이학교 출신이라는 것이 문화적 격차를 느끼게 했다는 것이다. 이현란이 떠난 뒤 매일 밤 과음하며 혼자 괴로워하면서도 박정희는 군복을 벗은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만군 선배 백선엽의 배려로 육군 정보국에 비공식 문관으로 근무할 수 있었다.

그는 여기에서 훗날 거사의 핵심 세력이 될 김종필(金鍾泌) 등 육사 8기생 15명과 같이 일하게 된다. 일본육사(57기)를 3등으로 나온 박정희의 탁월한 군사적 판단력에 감탄한 8기생들이 모두 그를 믿고 따르는 가운데 6·25가 터졌다. 이 시기의 정보국장이었던 장도영(張都暎)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6월 30일 오전 중 수원국민학교에 임시로 설치된 정보국에 나갔더니 박정희 문관과 장병들이 무사히 와 있었다. 28일 새벽에 적군이 서울에 진입한 상황으로 보아 그는 다르게 행동할 수도 있지 않았겠는가.”(장도영, ‘나는 박정희를 신임했다’, <신동아>, 1984년 7월호)
이후 장도영은 박정희의 복직을 상부에 건의했다.

그 결과 박정희는 상부의 재가를 거쳐 1950년 7월 14일 현역 소령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6·25와 장도영이 그를 살린 셈이었다. 나쁜 일은 겹쳐서 온다지만 좋은 일도 함께 온다. 같은 정보과에서 근무하던 대구사범 후배 송재천(宋在千) 소위가 외가 쪽 동생뻘이 되는 육영수(陸英修)란 처녀를 소개했던 것이다.

부산 영도로 피란 내려와 일본식 2층집에 세 들어 살던 육영수는 당시 스물여섯 살이었다.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이 진행되던 9월 15일 박정희는 중령으로 승진했다.

그리고 그 해 12월 12일 대구 계산동의 천주교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이때 신랑신부와 일면식도 없는 상태에서 주례를 섰던 허억(許億) 대구시장이 “신랑 육영수군과 신부 박정희양은…” 하고 서두를 떼는 바람에 장내를 웃음바다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꽤 유명하다. 이때부터 박정희의 얼굴에 웃음이 돌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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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맨 왼쪽)이 강원도 순시 후 귀경길에 지하철을 타보았다.

박정희와 이승만 제거 계획

1951년 말 박정희는 육군본부 작전국 차장에 임명된다. 작전국장은 일본육사(50기) 출신의 이용문(李龍文) 준장이었는데 호방한 그는 치밀한 박정희와 대조적인 성격이었지만 시국을 보고 역사를 인식하는 면에서 서로 의기투합했다.

그런데 이 무렵 국회로부터 불신임을 당하고 있던 이승만은 국회간선제로는 대통령에 재선될 가망이 없다고 보고 관제 데모 등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면서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을 추진했고, 이에 맞선 야당은 야당 나름대로 내각제 개헌안을 추진했다.

이처럼 정부와 국회가 정면으로 맞서자 이승만은 전방에 있던 군부대의 일부를 빼돌려 부산을 중심으로 한 영남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른바 부산정치파동의 시작이었다.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전하고 있던 각국은 미국에 항의를 퍼부었다.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한다는 명분으로 파병하여 귀중한 피를 흘려온 것인데, 한국정부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난처한 입장에 빠진 미국은 ‘이승만 제거계획’을 세웠고 이 같은 방침은 한국군 수뇌부에도 암묵적으로 전달되었다. 아무리 미국이라 하더라도 대통령의 제거계획은 한국군을 매개로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미국의 의도를 적극적으로 해석한 작전국장 이용문은 작전차장 박정희와 거사를 의논했다.

당시 작전과장 유원식(柳原植)에 따르면 박정희는 언양에 주둔하고 있던 15연대를 동원, 이승만 정권을 뒤엎고 과도정부를 세워 민정에 이양할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유원식, 5·16비록 <혁명은 어디로 갔나?>, 1987)

한편 이용문은 평양고보 2년 후배인 장면 총리의 비서실장 선우종원(鮮于宗源)을 만나 “우리 함께 혁명을 해서 장면을 대통령으로 만들자”며 쿠데타를 제안했으나 보기 좋게 거절당하고 말았다.(선우종원, <격랑 80년>, 1998)

6월 2일경 육본 참모회의에서 이승만에 대한 쿠데타 논의가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당시 영남계엄사령관 원용덕(元容德) 휘하의 계엄군은 200∼300명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2개 대대병력만 투입하면 임시수도 부산을 손쉽게 장악할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이에 대한 의견을 묻자 박정희는 “그 문제는 상부에서 결심하시기에 달려 있습니다.

한다고 결정되면 지장이 없게시리 수배되어 있습니다”라고 답변했다. 그러나 이승만의 제거를 바라던 미국은 쿠데타에 대한 명시적인 지침을 내리지 않았다. 미국은 쿠데타보다 국회의 합법적 선거를 통해 장면이 당선되기를 더 바라는 입장이었다. 여기에서 회의는 미국의 보다 명시적인 입장 표명이 없는 한 중립을 지킨다는 쪽으로 결말을 냄으로써 거사에 대한 박정희와 이용문의 꿈은 무산되고 말았다.

그러나 군의 움직임을 포착한 이승만은 7월 11일 이용문을 수도사단장으로 전출시키고, 7월 22일 이종찬을 참모총장직에서 해임함으로써 이 문제를 매듭지었다.

박정희는 도미 유학을 떠나는 이종찬에게 “차라리 지난번 구국을 위해 행동을 단행한 것만 못했다. 1년 후 귀국하면 다시 지도편달을 받겠다”(강성재, <참군인 이종찬 장군>, 1986)는 요지의 편지를 보냄으로써 무산된 거사의 아쉬움을 달랬다. 그러나 군의 정치 개입을 학습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에게는 의미 있는 사건이기도 했다.

박정희와 사주

박정희는 1917년 9월 30일 인(寅)시 생이다. 이를 간지로 옮기면 정사(丁巳)년, 신해(辛亥)월, 경신(庚申)일, 무인(戊寅)시가 된다. 이 사주의 특징은 지지의 네 글자가 사주족보에 올라 있는 ‘인신사해(寅申巳亥)’를 다 갖추었다는 점이다. 이런 사주를 그쪽 전문용어로는 ‘사맹격(四孟格)’, 쉬운 말로는 ‘제왕격’이라고 한다.

일본의 평민 영웅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사주가 바로 사맹격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6·25가 끝나고 1953년 11월 25일 육군 준장에 진급한 박정희는 그 해 말 미국 포병학교로 유학을 갔다. 그리고 귀국해서는 2군단 포병사령관, 포병학교 교장, 제5사단장을 역임했고 1956년에는 육군대학에 입교했다.

1958년 육군 소장에 진급한 박정희는 1군단 참모장, 6관구사령관을 거쳐 1960년 1월 21일에는 군수기지 사령관으로 부산에 부임했다. 여기에서 그는 경남 함양 출신의 박재현(朴宰顯)이란 젊은이를 만난다. 계급은 일등병이었다. 어려서 신동 소리를 들었다는 그는 거창농고를 졸업한 뒤 지리산에 들어가 그곳의 기인·달사들과 교유하면서 도룡(屠龍), 곧 용 잡는 기술을 익힌 기이한 인물이었다.

그런 그도 나이가 되자 입대하여 부산군수기지에 배속되었다. 아직 20대였지만 사람의 운명을 감정하는 데 있어서는 이미 경지에 올라 있었다. 그런 소문을 듣고 속칭 ‘박 도사’를 부른 것이었는데 한 저서는 그 만남을 이렇게 묘사했다.

“제산(박재현)은 이때 박 장군에게 특별한 운명을 예언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신은 장군에서 끝나지 않고 앞으로 제왕이 될 수 있는 운명의 소유자라고 말이다. 박 장군도 자신의 운명에 대한 예언을 점쟁이 일등병의 헛소리로 흘려 듣지 않고, 상당히 현실성 있는 예언으로 받아들였다.”(조용헌, <사주명리학 이야기>,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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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이 서독에 파견된 광부단과 간호원들에게 격려사를 하고 있다.

“제왕의 운세!”

지난날 만주에서 들었던 것과 비슷한 이 말은 거사에 대한 심리적 자신감을 심어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5·16군사혁명사> 편찬간사였던 이낙선(李洛善) 중령이 정리한 내용에 따르면 박정희가 거사를 처음 구상한 것은 아직 부산군수기지 사령관으로 발령이 나기 전인 6관구사령관 시절이었다.

그 계기는 <사상계> 1960년 1월호에 실린 ‘콜론보고서’였는데, 미 상원 외교분과위원회가 요청하여 미국 콜론연구소가 작성했다는 이 보고서가 왜 그 시점에 한국의 <사상계>에 실리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 의문이다. 왜냐하면 거사에 참가했던 한 장성이 회고한 것처럼 그 보고서는 한국의 “젊은 장교들을 분개시켜 결국 5·16 군사혁명을 태동케 한 원인이 되었기” 때문이다.(김윤근, <해병대와 5·16>, 1987)

당시 군 안팎에서 일대 파문을 일으킨 이 보고서는 결론적으로 한국 군부의 궐기를 종용하는 듯한 내용이었다. “민주주의가 부적절할지도 모르는” “한국에는 현재 커다란 정치적 신망이나 조직력을 가진 군인은 없기 때문에” “가까운 장래에 군부지배가 발생할 것 같지 않다”는 요지의 이 보고서를 읽은 박정희도 분개했던 것 같다.

“없긴 왜 없나? 여기 한 사람 있는데!” 필시 그런 기분에서 그는 김동하(金東河) 해병대 소장을 신당동 자택으로 불러 거사를 의논했던 것 같다. 그 직후 부산군수기지로 전보되어 일등병 박 도사를 만났고, 그로부터 제왕의 운세라는 소리를 듣게 된 것이다.

2월에 들어서면서부터 그는 동래온천장 등지에서 이주일(李周一)·윤태일(尹泰日)·최주종(崔周鍾)·김윤근(金潤根) 등 뜻있는 장성들과 5월 8일 거사를 단행하기로 모의하는 가운데 4·19를 맞았다.

계속-

나머지 전문은 월간중앙 7월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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