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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56)-제79화 육사졸업생들 (9)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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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우리가 2년간의 예과과정을 마치고 본과에 올라갔더니 만주군관학교에서 한인학생 8명이 편입돼 와 있었다.
만주신경군관학교 (예과) 3기로 들어갔다가 일본육사 58기로 들어온 분은 최주종·강봉민 두 장군이었고 59기로는 강문봉장군 등 6명이었다.
함북 성진태생인 최주종선배는 헌신적이고 스케일이 크면서도 겸손하고 리더쉽이 있어 편입생이면서도 금방 우리 한인생도들의 대장노릇을 하게 됐다. 그때 우리는 최선배가 시키는 대로 잘했고 잘 따랐다.
최장군은 일본군 소위로 있다가 해방이 되자 군영반을 거쳐 중위로 임관되어 사단장을 할 때 5·16을 만나 군대를 이끌고 혁명에 가담했다. 그후 최고위원·주택공사사장을 거쳐 지금은 농장을 하고있다.
함께 편입해온 강태민장군은 온건한 분이었는데 6·25 때 준장으로 전사했다.
강문봉장군은 간도의 용정에서 태어나 만주군관학교 5기로 입교했으나 성적이 우수하여 월반, 4기가 됐고 거기서도 뛰어나 졸업 때는 수석이었다. 그 때문에 황제 상으로 금시계를 받고 일본육사로의 편입특전도 누렸다.
해방 후에는 여달형을 따르다가 그가 좌경하자 거기서 이탈, 군영반을 거쳐 소위로 임관,채병덕대위와 함께 제1연대를 창설했고 군단장을 거쳐 제2군사령관까지 했다.
김창룡암살 등 여러 가지 사건의 피해자로 수난을 겪어오면서도 국회의원·대사를 지냈고 지금은 연세대에서 행정학 박사과정을 밟고있는 면학파다.
조선과 만주를 점령하고 다시 중국을 침략하고 있던 일제는 만주에서 오족협화라 하여 한인·일인·만주인·한인·몽고인의 화합을 부르짖으면서도 실제로는 차별정책을 노골적으로 폈다. 그것이 사관학교에서도 나타났는데 한인과 일인은 별도로 중대를 편성하여 쌀밥을 급식했으나 나머지 한·만·몽계에게는 수수나 조밥을 주었다는 것이다.
강장군은 만주의 신경제일중학을 나왔기 때문에 군관학교에서는 만주계로 소속돼 있었으나 월반하는 바람에 일계중대로 옮겨졌다.
만주군관학교에는 봉천·신경 두 학교가 있었다.
봉천군관학교는 2년 제로 봉천에 있다가 1939년 신경(장춘)에 4년 제 군관학교가 설립되면서 폐지됐다.
해병대사령관을 지낸 김석범장군(67·중장예편) 이나 육군의 정일권장군 (65) 석희봉 선생 같은 이는 봉천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여 부대근무를 하다가 일본육사 본과에 편입된 분들이다.
만주에서 각종 군관학교를 나오고 바로 만주군부대에 배치된 분들 가운데서도 유명한 장군이 많이 나왔다.
몇 분만 들더라도 헌병사령관을 지낸 원용덕중장(군영·만군군의 중령·작고). 합참의장과 두 차례의 참모총장을 지낸 백선엽대장(군영·중위), 국방차관을 지낸 김일환중장(군영·만군경리대위) , 해병사령관을 지낸 신현준중장(특임·대위)과 김동하중장(특임·중위), 군단장까지 올라갔다가 6·25때 전사한 김백일중장(군영·대위), 5·16에 서울시장을 지낸 윤태일중장(9기·중위), 그리고 양국진중장 (군영·대위·작고), 박동균소장 (군영·군의대위) , 문용채중장(군영·대위), 신학진소장 (군영·군의중위·선경물산고문), 송석하소장(2기·중위), 석주암소장(2기·대위·대우중공업고문), 김묵소장(7특), 박춘식소장(5기·중위·작고)이 있고 그밖에도 북괴군 소령으로 있다가 월남, 귀순한 이기건준장(7특·중위)이 있다.
서울대공대의 김동훈교수나 인하대의 육굉수교수, 한양대의 김광식교수 등도 만주군관학교를 나왔으나 군인으로서보다는 학자·교육자로 더 알려진 분 들이다.
이북 태생이 많은 이들 만주군관학교 출신들이 해방후 한국군에 들어와서는 일본육사출신들보다 더 진출이 현저했는데 그 이유는 여러모로 분석되고 있다.
어떤이들은 5족간의 격심한 경쟁가운데서 배양된 그들의 능력을 꼽는다. 또 어떤 외국 군사전문가는 고문관제도에 잘 적응했던 점을 강조한다.
해방 후 한국군은 미군의 지원과 협력으로 탄생·육성되었으므로 미국인을 고문관으로 두어야 했다. 따라서 그들과 대화할 수 있는 어학실력이 요구되고 이를 바탕으로 그들과 잘 절충하고 타협하며 원만하게 부대를 운영하는 것이 좋은 평가를 받게 마련이었다.
그런데 만주군출신들은 일찍부터 일본인 고문관제도 아래서 성장했기 때문에 미군고문관과도 잘 지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미군과 관계가 밀접한 해병대에서 만주군출신들이 특히 성공을 보였는데 이것은 그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반면 그렇지 못한 일본육사출신의 김석원·유승렬장군은 전쟁발발 후 얼마안가서 요직에서 물러나야 했고, 정내혁장군은 자주 미군고문관들과 충돌, 일시 군대를 그만 두기도 했다.
대체로 일본군출신들은 군의 통수권에 민감하고 위엄을 중시하는 점에서 만주군 출신들과 대조를 이루었고 체질적으로 고문관제도를 수용치 못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주장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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