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실록박정희시대]12. 만주군 인맥…5.16도왔지만 끝내 토사구팽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여순 (麗順) 사건 발생 직전인 1948년 여름 서울 안국동의 요릿집 아향 (雅香) .30대 전후 청년장교들이 모여 단합대회를 갖고 있었다.

방 가운데 길게 놓인 술상을 마주보고 앉은 이들은 모두 만주군 장교 출신들이었다.

술잔이 오가면서 분위기가 무르익을 무렵 갑자기 고성이 터져 나왔다.

윤태일 (尹泰日.만주 신경군관학교 1기.전서울시장.작고) , 이한림 (李翰林.76.신경 2기.전건설부장관) 씨가 시국현안이었던 이데올로기 문제로 얘기를 나누다가 언성이 높아진 것이다.

언쟁이 계속되면서 분위기는 점점 험악해졌다.

이때 구석자리에 앉아 말없이 술만 마시고 있던 조선경비대 사관학교 (육사의 전신) 중대장 박정희 (신경 2기) 소령이 갑자기 맥주잔을 와작 씹기 시작했다.

그의 입가에는 순식간에 선혈이 낭자했다.

주위의 시선이 일순 그에게로 쏠렸다.

입속의 유리조각을 내뱉고는 벌떡 일어나 술상 위에 올라선 그는 "후배가 선배에게 그렇게 대들어도 되는 거야" 라고 소리쳤다.

이날 술자리는 박정희의 돌출행동으로 판이 깨지고 말았다.

5.16 직후 구성된 국가재건최고회의 명단에는 육군 소장 박정희를 비롯해 육군 중장 박임항 (朴林恒.신경 1기) , 육군소장 이주일 (李周一.신경 2기) , 육군 준장 최주종 (崔周鍾.신경 3기) , 해병 준장 김윤근 (金潤根.신경 6기) 등 신경군관학교 출신 4명이 들어 있었다.

나중에 외무국방위원장에 선임된 김동하 (金東河.해병대 중장 예편) 씨도 신경군관학교 1기 출신이다.

이들은 5.16 당시 병력을 동원하거나 거사준비 과정에서부터 참여한 핵심이었다.

신경군관학교 출신들 가운데서도 1기생들과 2기생들이 가장 가까웠다.

군관학교 시절 박정희등 2기생은 1기생 선배들로부터 가혹한 '얼차려' 를 받았다.

박임항 (전건설부장관.작고) , 최창륜 (崔昌崙.6.25때 전사) , 방원철 (方圓哲.77.육본 초대 전사감) 씨등은 이들을 잘 키워 보겠다며 엄하게 다뤘다.

이때 다져진 선.후배간의 인간적인 유대는 5.16 거사의 밑거름이 됐다.

5.16은 병력 동원과 기획을 맡았던 육사 5기와 8기생, 즉 박정희가 육본 정보국과 육사 중대장 시절에 인연을 맺었던 부하들이 중심이었다.

여기에 신경군관학교 선.후배들은 오랜 인연을 맺은 벗이자 동지였다.

5.16 당일 박정희와 군관학교.일본 육사 동기생인 이한림 1군사령관은 해병대에 전화를 걸어 "여단장 (김윤근.70.해병 중장 예편) 도 나갔어?

확실히 나갔어?" 하면서 확인전화를 건 적이 있다.

뒷날 李씨는 "해병대의 김윤근 부대가 가담한 것을 알고는 진압을 포기했다" 고 술회했다.

당시 해병대는 군 내부에서도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군관학교 인맥의 또 한 갈래는 신경군관학교 전신인 봉천군관학교 출신들이다.

朴정권하에서 국무총리를 지낸 정일권 (丁一權) 씨, 초대 해병대사령관을 지낸 신현준 (申鉉俊.82.해병 중장 예편) 씨등은 5기생이고 백선엽 (白善燁.77.육군 대장 예편) 씨는 이 학교 마지막 기수인 9기생 출신이다.

5.16 당시 이들은 대부분 예편해 있었다.

만군인맥의 선배그룹인 이들은 박정희가 여순사건 직후인 48년 11월 좌익 연루 혐의로 구속됐을 때 구명운동을 펴 그를 살려낸 주역이기도 하다.

그러나 5.16을 기점으로 박정희와 만주군관학교 선.후배들은 서로 등을 돌린다.

만주군관학교 출신으로 5.16에 참여한 숫자는 그리 많지 않다.

그렇지만 이들은 대개 장성급이었다는 점에서 5.16에 무게를 실어주었다.

그러나 권력의 생리는 냉혹했다.

토끼 사냥이 끝나니 사냥개를 잡아 먹는다는 토사구팽 (兎死狗烹) 의 논리가 이들을 덮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김윤근씨는 "박정희는 군관학교와 일본 육사 동문중에서 단 한명도 육참총장을 배출하지 않았다" 며 "이는 박정희가 동문 선.후배를 경계했던 것" 이라고 풀이했다.

사석에서 "어이, 박정희 (또는 朴소장)" 라고 부르며 朴의장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던 이들이 언제부터인가 부담스러워졌던 것이다.

박정희와 군관학교 출신들의 사이가 뒤틀어진 결정적인 계기는 민정이양을 둘러싼 충돌 때문이었다.

공화당 창당과정에서 빚어진 잡음으로 김종필 (金鍾泌) 씨가 '자의반 타의반' 외유를 떠나기 1주일 전인 1963년 2월18일. 당시 대통령 권한대행 박정희 의장은 조건부 민정 불참을 골자로 한 '시국수습에 관한 9개 방안' (2.18선언) 을 내놓았다.

이 선언이 발표된 직후 1기생 김동하.윤태일.박임항은 서울 약수동 비밀요정에서 박정희를 만나 "혁명공약 6항에는 우리의 과업이 완수되면 군대로 복귀한다고 돼 있다.

우리는 이 공약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

만약 이것이 지켜지지 않을 경우 우리는 빠지겠다" 며 으름장을 놓았고 박정희는 "반드시 그렇게 하겠다" 며 굴복했다.

박정희는 돌아와 이 문제를 김종필과 상의했는데 金씨는 "등기문서는 처음부터 내 이름으로 해야지 제3자 이름으로 했다가 다시 내 이름으로 하자면 어렵다" 며 朴의장의 민정 참여를 강력히 주장했다고 한다 (군관학교 출신 Q씨 증언) . 이 일이 있은지 한달도 지나지 않은 그해 3월11일 김동하.박임항.박창암 (朴蒼岩) 등이 포함된 소위 '군 (軍) 일부 쿠데타사건' 이 발표됐다.

5일 뒤인 3월16일 朴의장은 군정 4년 연장을 제의하면서 정국을 다시 긴장상태로 몰고 갔다.

결국 박정희로서는 생사를 함께 한 혁명동지이자 선.후배들의 목을 자르면서 민정 참여의 명분을 축적한 셈이다.

당시 재판부는 '사건 아닌 사건' 을 처리하면서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결국 이 사건은 피의자들이 기소사실을 시인하고 곧이어 보석.사면.복권되는 수순으로 처리됐다.

이 사건은 박정희와 김종필계가 주체세력 내부에서 민정이양과 군의 원대복귀를 주장하는 껄끄러운 존재들을 거세한 작전이었다.

당시 언론은 이 사건을 '알래스카 토벌작전' 이라고 꼬집었다.

이들 대다수가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함경도 출신인 점을 지칭한 것이었다.

이로써 만군인맥은 군에서 거의 자취를 감췄다.

만군인맥 중에서 박정희와 가까워 비교적 순탄한 길을 걸어온 이주일씨까지도 몇 차례 고비를 넘어야 했다.

74년 6월 5.16 주체중 한사람인 홍종철 (洪鍾哲.전최고위원) 씨가 작고했을 때 李씨는 洪씨 상가에 들렀다가 귀가길에 일행과 명동에서 술을 한잔 마시며 "그 사람 대통령감인데…. 일찍 죽어 안됐다" 고 洪씨의 죽음을 아쉬워했다.

그런데 이 얘기는 다음날 '李씨가 洪씨를 대통령으로 밀려고 했다' 고 보고됐다.

'요주의 인물' 로 낙인 찍힌 만군인맥들은 이른바 '반혁명사건' 때마다 거명됐다.

김동하씨는 "반혁명은 내가 '전매특허' 를 받아놓았나. 왜 내 이름이 항상 거론되는지 모르겠다" 고 불만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

64년 5월 총리로 취임한 정일권씨가 겪은 일화 한 토막은 박정희의 만군인맥에 대한 경계심을 잘 드러내준다.

丁총리는 어느날 5.16후 군에 복귀해 군수기지사령관으로 있던 후배 최주종씨로부터 "형님, 저 이번에 중장 진급을 앞두고 있습니다.

잘 부탁합니다" 라는 인사를 겸한 부탁을 받았다.

평소 崔장군을 좋게 봐오던 丁총리는 박정희를 찾아가 "이번 장군 진급에 崔장군을 선처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고 부탁했다.

그로부터 2주일 후 崔장군에게는 예편 통지서가 전달됐다.

한편 박정희는 권력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거나 불우한 동창생들에 대해선 비교적 온정을 베풀었다.

술자리에서 노래를 잘해 기생들도 혀를 내둘렀다는 예관수 (芮琯壽.신경 4기) 씨의 경우가 한 예다.

박정희는 '예관수는 정치성이 없지' 라며 사업을 돌봐줘 한때 그의 소득이 재벌 대열에 든 적도 있다고 동창생들은 말했다.

5.16 주체 가운데 권력투쟁의 와중에서 날개 꺾인 사람들에 대해서도 국영기업체 임원자리를 주거나 사업을 돌봐주기도 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박정희는 권력에 도전할 위험성이 있는 인물에 대해선 서릿발 같은 냉혹함으로 대했지만 권력욕을 포기한 사람에 대해선 최소한의 인간적인 의리를 지키려고 했던 것같다.

청년장교 시절을 만주에서 같이 보냈고 5.16 때는 목숨을 걸고 거사를 같이 했던 만군인맥. 그들은 朴정권 하에서 영광과 오욕을 동시에 맛봤다.

박정희와 애증을 경험한 그들의 상당수는 이미 고인이 됐고 생존자들도 80세를 바라보고 있다.

이제 그들 역시 박정희와 함께 역사속의 인물로 사라져 가고 있다.

특별취재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