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초기의 선교사들(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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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1883년9월 최초의 방미사절로 미국에 간 민영익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워싱턴으로 향하는 대륙횡단 열차 속에서 우연히 한 감리교 목사와 자리를 같이했다.
그 사람은 당시 볼티모의 가우처대 학장으로 있는「존·가우처」목사. 그는 난생 처음 듣는 나라에서 온 이상한 옷차림의 민영익 일행에 흥미를 가졌으며「은자의 나라」조선에 대한 얘기를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조선에 대한 기독교선교 가능성을 확신한「가우처」목사는 곧 감리교선교본부에 조선선교를 건의하고, 선교사를 파송 할 것을 제안했다.

<한국말부터 배워>
이때 조선과 인연을 맺게 된 사람은 뉴욕출신의 열렬한 초교파주의자「호리스· G· 언더우드」와 펜실베이니아 출신의 헌신적인 감리교신자「헨리·G· 아펜젤러」.
이들이 각각 장로교와 감리교의 조선파송 선교사로 임명됐을 당시의 나이는 26, 27세. 갓 신학교를 졸업, 투철한 신앙심과 개척자적 사명감이 불타오르던 두려움 없는 젊은이들이었다.
1885년4월5일 이 두 사람은 한국 땅(제물포)에 처음 발을 내디뎠다. 당시는 갑신정변 직후로 한국내 정세가 극히 어수선하던 때. 그래서 미국공사관에서는 부부동반인「아펜젤러」에게는 일본으로 돌아가 때를 기다릴 것을 권고,「아펜젤러」는 부득이 일본에서 2개월 동안을 기다려야했다.
혼자 몸으로 상륙이 허가됐던「언더우드」는 곧 서울로 들어와 당시의료선교사「일런」이 운영하던 광혜원에서 한국인 학생을 상대로 물리와 화학을 가르치는 한편, 한국어를 열심히 배워 틈나는 대로 거리에 나가 전도기회를 살폈다.
프로티스턴트 기독교와 한국과의 첫 인연은 183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태국에 와 있던 독일인 선교사「카를·귀즐라프」는 동인도회사소속 로드 앰허스트호를 타고 중국의 산동을 거쳐 황해·충청도 지방에 상륙, 주민들에게 성경과 감자를 주고 간 적이 있다.
이후에도 중국주재 영국인 목사「로버트·토머스」가 목선을 타고 서해안을 다녀갔고 (그는1866년 제네럴 셔먼호를 타고 다시 한국에 왔다가 대동강변에서 순교), 스코틀랜드 장로회소속「존·로스」목사와 「존·매킨타이어」목사는 동만주에 대한 선교과정에서 당시 만주를 드나들던 조선상인들을 만나, 이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이들과 성서를 번역, 그 성서를 조선 내에 유포시켰다.
그러나 본격적인 선교가 시작되기는 한·미 수호조약이 체결된 1882년 이후. 수교 다음해인 83년 서울에 미국공사관이 설치되어 비로소 조선이 멀리 소개되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미국내 각 선교단체에서도 조선선교에 관심을 갖게 됐다.
미국 개신 교회 중에서 최초로 조선주재선교사를 파송한 교회는 북장로교. 1884년 9월, 당시 중국에 가있던「앨런」에게 새 선교지로 조선주재를 승인, 9월20일 그가 제물포에 도착함으로써 한국에 도착한 첫 개신교 선교사가 됐다.
그러나 이에「앨런」의 공식적인 신분은 어디까지나 미국공사관에 소속원 의사. 최초의 공식적인 선교활동은「언더우드」「아펜젤러」의 입국으로 시작된 셈이다.
85년 4월 한국에 도착, 선교사 생활을 시작한「언더우드」는 처음 1년간은 한국어 공부에만 열중했을 뿐 직접 선교에 뛰어들지는 않았다. 그가 본격적인 선교에 앞서 시작한 것은 고아원사업. 의지할 때 없는 부랑소년을 모아 기르는 이 고아원은 예수교학당 또는 구세학당으로 불렸는데, 김규식·안창호 등이 이곳을 거친 인물들이며, 후에 경신학교로 발전했다.「언더우드」의 고아원은 당시 한국인들의 몰이해로 말썽이 끊이질 않았다. 그 대표적인 예는 소위「아기소동」. 서양인 병원은 조선아이를 잡아죽이는 도살장이며, 외국공관에서는 조선아이를 잡아먹고, 고아원은 잡아먹을 아이를 살찌우거나 미국에 데려가 종으로 만드는 곳이라는 소문이 나들아 고아원 문을 닫아야 할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당시 서울에는 약70명의 기독교 신자가 있었다. 이들은 주로 서울에 거주하는 외국인들로 이중 10여명이 매주 일요일「앨런」의 집에 모여 주일예배를 봤데는, 87년9월부터는 정동「언더우드」집 사랑방으로 옮겨져 계속됐고 외국인병원·공관에 근무하는 한국인들도 이에 참가했는데, 이것이후에 서울 새문안교회로 발전했다.

<배재학당의 전신>
감리교의「아펜젤러」는 처음부터 교육을 선교의「가장 유용한 분야」로 판단, 85년 가을 정동 자기 집에 한국인 청년들을 모아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했고, 87년에는 정부의 인가를 획득, 배재학당으로 발전시켰다.
87년4월「아펜젤러」는 그가 한국에서 얻은 맨 처음 신자인 한 일본인에게 세례를 주었고, 이어서 9월 정동에 조그만 집 한 채를 구입, 예배당으로 꾸며 한인들을 위한 공중예배장소로 사용했는데, 그것이 베텔 예배당. 후에 정동교회로 한국최초의 감리교회였다.
같은 해 그는「언더우드」「게일」등과 함께 한국성서번역회를 설립,『마태복음』『마가복음』『고린도 전후서』를 한글로 번역, 일반에 보급하는데 진력했다.
그러나 봉사와 헌신으로 점철된 그의 일생은 전혀 뜻하지 않은 일로 끝이 났다. 1902년6월 목포에서 열리기로 된 성서번역자회의에 참석키 위해 인천에서 배편으로 떠났다가 배가 충돌하는 사고를 만나 숨졌다.
글 정우호 기자 사진 채흥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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