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가사로부터 풀려난 건가…|집안일 편리해졌다지만 주부의 할 일은 산적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P여사의 말은 여성은 가정으로부터 추방당하고 있으므로 이제는 주부도 자신의 일을 찾아 갖지 않으면 후일 자신에게 돌아오는 엄청난 외로움을 견디기 어려울 것이라는 것이었다.
공감이 가는 얘기였고, 나자신 나의 일을 갖고자 나름으로 애쓰는 판이었으므로 그녀의 말에 이의가 없었으나 여성이 『가정으로부터 추방당하고 있다』는 발상은 기발하다고 생각되었다.
추방당한다는 것은 가사로부터의 놓여 남을 말하고 있었는데, 이는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인 형편이지 추방당한다라는 다분히 역설적인 표현은 나 자신 생각지도 못했던 발상이기에 내심 무릎을 치며 감탄했던 것이다.
주부가 가정을 갖고 있으면서도 직장이나 자기의 일을 갖는 것은 주부가 자신의 자리를 이탈해간 것이 아니라 주부가 가정으로부터 추방당했기 때문이라는 이 당당한 논리는 직장을 가진 주부의 어깨를 펴추기에 충분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편리한 가전제품이 일반화되어가면서 주부의 일을 뺏어 갔으며 식품의 인스턴트화로 장독대의 권위가 사라져가고 있으며 의류의 기성복 시대로 주부의 바느질 솜씨는 기껏 떨어진 단추를 다는 정도로밖에 발휘되지 못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 명쾌한 논리에도 불구하고 나자신 솔직이 고백하거니와 가사로부터의 추방을 충분히 누리고 있다고도 여겨지지 않는다.
오늘만 해도 내겐 마음을 까야 할 일등 일상의 그 자질구레한 일말고도 하루 품을 좋이 잡아야 할 일로 나를 은근히 압박하고 있는 형편이다.
썩기전에 것 찧어 냉동시켜둬야 할 마늘까기 외에도 내 손이 거쳐가야 할 곳은 부지기수로 이어져 있기만 하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것들을 적당히 외면해 버림으로써 야금야금 살림에 자신없는 잠재의식을 키워 갔었다.
그러면서도 내 일을 가져보겠다고 뒤늦게 병아리강사 생활에 발을 디밀어 놓았던 형편이라 나는 가정, 또는 살림에는 자신감을 가져서는 안될 형편이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남비닦는 일이다. 온몸을 미친듯이 흔들면서 문질러대야 하는 일이란!)
그런데 P여사는 그 온갖 난제들을 모조리 포함하여 도리어 우리를 피해자의 위치인양 역습을 해 버린 것이다.
나는 여기서 <발상법>의 묘수를 새롭게 발견한다. 가장 비논리적이며 끝없는 도노인 가사도 이처럼 뒤집어 놓으면 비본질적인 것들은 문제밖이 되어 버린다. 또 본질적인 것의 입장이 바뀌면 지엽적인 문제는 자연히 해결되게 마련이다.
한바탕 유쾌하게 웃는 기분이 되어 자신 없는 가사로부터 한걸음 뒤로 물러나 여유있는 마음이 되어 본다. 가정이 나를 추방하더라도 나는 가사를 사랑해 줘야지. 나는 봐주겠다. 이런 심경, 재미있지 않은가!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