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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왜 아끼던 아들 사도세자를 죽였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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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탕평평(蕩蕩平平), 싸움·시비·논쟁에서 한쪽에 치우침 없이 공평하다는 뜻이다. 그저 이상론일까. 하지만 290년 전 조선에서 이를 현실화한 임금이 있다. 바로 영조다. 그는 당쟁의 폐단을 막기 위해 각 당파에서 고르게 인재를 등용하는 탕평책(蕩平策)을 썼다. 이를 통해 정국을 안정시키고 민생 개혁을 추진하면서 18세기 중후반 조선 중흥을 이끌었다. 하지만 친아들인 사도 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인 비정한 아버지이기도 하다. 사도세자의 죽음은 최근 각종 드라마·영화를 통해 재조명되고 있다. 각종 사료(史料)와 교과서, 언론이 기술하고 있는 영조에 대해 알아봤다.

영조(1694~1776)

1724~76년 조선 중기 중흥기를 이끈 21대 임금. 27명의 조선 임금 중 통치 기간이 가장 길다.

영조의 가장 큰 치적은 당파에 치우치지 않고 인재를 등용한 탕평책이다. 숙종에서 경종에 이르는 18세기 초는 붕당(朋黨) 간 대립과 정쟁이 극에 달했던 시기다. 정치적 반대세력에 대한 보복과 탄압은 잔인했다. 언로는 막히고 민생은 파탄났다. 영조는 이런 붕당의 폐단을 극복하고자 했다. 그는 영의정이 노론이라면 좌의정은 소론을 임명하는 등 붕당 간 균형 인사를 했다. 또 노론·소론·남인 등 여러 붕당을 고루 관직에 배치했다. 붕당 간 대립은 완화했고 국정은 안정을 되찾았다. 영조는 이를 바탕으로 민생 개혁을 추진했다. 백성의 세 부담을 줄인 균역법을 실시했고, 『속대전』 『속오례의』 『동국문헌비고』을 편찬하며 조선 중반 변화된 사회 체제에 맞춰 문물제도를 정비했다. 가혹한 형벌을 폐지하고 사형수에 대한 삼심제를 적용했다. 연산군 때 폐지됐던 신문고를 다시 부활시키기도 했다.

재위 25년(1749)부터 13년간 아들 사도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겼다. 그 전까진 부자 간 사이가 좋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대리청정 기간 동안 사도세자의 광증(狂證·정신병)과 살인·폭행 등 패륜행위가 불거졌고 영조는 결국 1762년 사도세자를 폐위시키고 뒤주에 가둬 죽인다. 이후 영조가 직접 통치하다 1776년 82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그 뒤를 이어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1752~1800)가 즉위했다.

붕당 정치

붕당 정치를 주도했던 세력은 신진 사대부인 사림이다. 조선 건국 초기 혁명파 사대부인 훈구세력에 맞선 온건 개혁파를 말한다. 사림은 15세기 후반부터 정계에 진출해, 선조(1552~1608) 때 중앙 정치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리베르는 “선조는 훈구 세력을 멀리하고 사림을 대거 기용하여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였다”고 설명한다.

 중앙에 진출한 사림은 선조 이후 광해군·인조·효종·현종·숙종을 거치며 학문적 해석과 정치적 입장차를 놓고 동인·서인·남인·북인·노론·소론 등 다양한 붕당으로 분화했다. 초기 붕당 정치는 향촌 사림의 여론을 수렴하고 공론을 형성해 상호 견제와 비판을 견인하는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 두산동아는 “상대방의 존재와 비판을 인정하는 붕당 정치로 17세기 중엽까지 정국이 비교적 안정되었다”고 적었다.

 하지만 숙종(1661~1720) 때 붕당 정치는 일당 독재 성격을 띠기 시작했다. 숙종은 붕당 간 건전한 감시와 균형을 추구하기보다 왕권 강화를 위해 특정 붕당을 탄압하거나 일거에 정계에서 내쫓는 환국을 세 차례나 실시했다. 붕당이 추구했던 비판과 견제의 긍정적 기능은 사라지고 관직독점 등 붕당 이익만 우선시하게 된 거다.

 이 과정에서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졌다. 리베르는 “노론은 송시열을 중심으로 결집하여 대의명분을 존중하고 민생 안정을 강조하였지만, 소론은 윤증을 중심으로 결집하여 실리를 중시하고 적극적인 북방 정책을 주장하였다”고 기술한다. 노론과 소론 양당에 의한 정치는 숙종 이후 경종을 거쳐 영조 때까지 이어졌다.

영조, 탕평 정치를 펼치다

영조실록엔 붕당 폐해를 지적하는 영조가 자주 등장한다. “붕당의 폐해가 요즘보다 심한 적이 없다. 처음에는 학문에 대한 해석이 달라 소란스럽더니, 지금에는 한편 사람을 모조리 반역하는 당으로 몰고 있다…관리들이 공격을 일삼고 싸움만 계속하고 있으니, 이러면 나라가 장차 어떻게 되겠는가. ”(영조실록 1725년 1월 3일)

 영조는 탕평 속에서 개혁 실마리를 찾았다. 당시 집권 여당에 해당됐던 노론뿐 아니라 정계에서 배제됐던 소론 일부와 남인을 적극 활용해 노론·소론·남인 간 정치균형을 추구했다. 일당 독재로 변질된 붕당 정치를 비판과 감시의 순기능으로 돌려놓기 위한 조치였다.

 언론은 영조의 탕평책을 국정 안정과 민심 수습의 본보기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사(人事)가 만사(萬事)다. 정권의 성공과 몰락이 모두 사람을 어떻게 쓰느냐에 달려 있다…박근혜 당선인의 제1과제를 ‘탕평인사’로 꼽는 건 이처럼 새로운 대통령의 첫 번째 인사가 국정 안정과 민신 통합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중앙일보 2013년 1월 3일 4면 ‘중앙일보 어젠다 ③ 대통합 핵심은 인사다’)

 하지만 영조의 탕평책은 한계가 있었다는 지적도 있다. 비상교육은 “영조의 탕평 정치로 왕권은 크게 강화되었지만, 영조 역시 사실상 노론에 의존하는 정치를 하였다”고 지적했다. 영조가 임금에 즉위한 것도 노론의 정치적 지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노론은 경종이 왕에 오르기 전부터 영조를 지지했다. 경종 다음 왕위 계승자로 영조를 책봉하자고 건의한 것도 노론이다. 그러니 영조 즉위와 동시에 노론은 집권당으로 정국을 주도한다. 영조의 이런 정치적 배경은 집권 내내 그를 괴롭혔다. 경종의 급작스러운 죽음에 노론과 영조가 관여한 게 아니냐는 의심, 다시 말해 경종독살설이 대표적이다. 영조 4년(1728) 이인좌의 난, 영조 31년(1755) 나주 벽서 사건 등은 모두 경종을 지지한 소론 일부 강경파가 영조의 정통성을 문제 삼으며 벌인 반란이다.

1736년 사도세자를 왕세자로 책봉한다는 글을 새긴 ‘장조 왕세자 책봉 죽책’(부분).

사도세자의 죽음, 광병설 vs 당쟁희생설

영조 38년(1762) 사도세자는 영조의 명에 의해 뒤주에 갇힌 지 9일 만에 27세의 짧은 생을 마감(임오화변)한다. 조선 518년 역사 중 가장 비극적 사건이었음에도 사도세자에게 그런 형벌이 내려진 배경과 죄명에 대한 기록은 구체적이지 않다. 영조실록은 임오화변 당일을 이렇게 그리고 있다. “천자(天資)가 탁월하여 임금이 매우 사랑하였는데, 10여 세 이후에는 점차 학문에 태만하게 되었고, 대리(代理)한 후부터 질병이 생겨 천성을 잃었다…병의 증세가 더움 심해져서 병이 발작할 때에는 궁비(宮婢)와 환시(宦侍)를 죽이고…”(영조실록 1762년 윤5월 13일) 세자빈 혜경궁 홍씨가 남긴 『한중록』에도 세자가 정신질환을 앓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금이나 온전한 정신이면 어찌 부왕을 죽이고 싶다는 극언까지 하시리오.”(한중록 122쪽) 사도세자가 후궁인 빙애를 죽이고, 내관·궁녀를 사사로이 죽였다는 기록도 있다. 사도세자가 장인 홍봉한에게 보낸 서찰에는 “열은 높고 울증은 극도에 달하여 미칠 듯 하다”며 본인이 병을 앓고 있음을 토로하고 있다. 사도세자가 광증(狂證·정신병), 즉 미쳐 살인과 폭행 등 패륜을 저질러 세자에서 폐위되고 죽음에 이르렀다는 광병설의 증거다.

 하지만 그럼에도 ‘왜 굳이 뒤주라는 극단적 방법으로 죽였을까’란 의문이 남는다. 영조 나이 41세에 어렵게 얻은 세자의 병을 치료하려하지 않고 극단적 형벌을 내린 사실은 이해하기 힘들다. 이런 의문은 새로운 해석으로 이어진다. 사도세자는 미친 게 아니라 노론의 정치적 음해로 희생됐다는 당쟁희생설이다.

 사도세자는 평소 문인보다 무인 기질이 강했다. 15세엔 힘 좋은 무사도 다루기 힘든 청룡도를 자유롭게 다뤘고, 말타기와 각종 무예에 능했다고 한다. 그는 영조 35년(1759) 『무기신식』이라는 무예서를 펴내기도 했다. 사도세자는 총명했고 성군 기질을 보였다는 것이다. 당쟁희생설에서는 사도세자가 대리청정 기간 나주 벽서 사건을 처리하며 노론의 제거대상이 됐다고 주장한다. 사도세자가 소론을 처벌하자는 노론 주장을 거부하고 소론을 지지했기 때문이다. 세자는 노론이 소론 제거를 위해 과도하게 사건을 부풀렸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영조는 노론의 주장에 동조했다고 전해진다. 사건 관련자를 조사할 때마다 영조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경종과 소론을 지지하는 발언이 쏟아져 나왔다. 영조 집권 내내 꼬리표처럼 따라다닌 경종독살설의 또 다른 재현이었다. 영조는 분노했다. 노론은 관련자를 모두 잡아들여 죽여야 한다고 상소를 올렸다. 하지만 대리청정을 맡았던 사도세자는 이를 거부했고, 이를 계기로 노론은 사도세자 제거에 나섰다는 것이다. (중앙선데이 2010년 1월 17일 ‘대리청정 덫에 걸린 세자의 뜨거운 가슴’)

글=정현진 기자 자문=최미정 중동고 역사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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