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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외신만으로 네 차례 호외|현지공관선 지스카르 당선 예상도|목숨걸고 지하게릴라 단독회견을 시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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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잊고싶은 한해>
○…『차라리 잊어버리고싶은 한해』였다고 미국의 UPI통신이 송년사를 타전했듯이 81년은 외신데스크로서는 바쁘고 우울한 한해였다.
총성으로 맞이해 총성으로 보내는 한해였기때문. 「레이건」미국대통령(3월30일)과 교황 요한·바오로 2세(5월13일)등 세계지도자의 피격, 「사다트」이집트대통령의 피살(10월6일), 이란의「라자이」대통령ㆍ「바오나르」수상의 죽음(8월30일). 남미의 정치학살, 북아일랜드의 폭동과「보비·샌즈」의 단식사망.
세모 l2월의 주말, 세계를 놀라게한 폴란드의 계엄령선포, 그에이은 유혈사태.
또 있다. 스페인과 태국 그리고 아프리카 몇나라의 쿠데타…. 이렇게 한해에 비보가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기는 예년에는 없었던것같다.
올해에 발행했던 4차례의 호외는 모두 외신부소관이었다. 호외에 실린▲「레이건」대통령의 피격▲「요한·바오로」2세 로마교황의 피격▲「사다트」이집트대통령의 암살 등은 크든 작든 역사의 향방에 영향을 미친 사건이었고 사상 처음으로 올림픽을 서울로 유치한 바덴바덴의 승전고(9월30일)는 한반도에 감격의 물결을 일게했다. 1주일 사이에 두번씩이나 호외 (서울올림픽유치·사다트암살)를 냈던 외신부는「세계의 사회부」였으며 24시간 가동되는 외신텔렉스실은 마치 작전사령부의 종합상황실」처럼 연속된 사건을 숨가쁘게 알려왔다.

<불발된 호두작전>
○…1월20일 미국대통령취임식날에 4백44일간 억류돼었던 미국인질이 풀려 나면서「바쁜 81년」이 예고됐다. 「레이건」대통령의 취임기사는 뒷전으로 가고 신문은 인질석방으로 뒤덮었다.
3월30일 하오2시「레이건 대통령이 어느 여배우를 사랑한 실연청년의 총탄을 맞고 쓰러졌을때 백악관의 징크스인「20년주기설」이 불길하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80년에 선출된「레이건」의 가슴을 향해 총성이 울린 바로 그시간에 워싱턴특파원은 제휴사인 워싱턴 포스트의 편집국에서 국무성출입기자인「돈·오버도퍼」기자와 느긋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누군가가『「레이건」이 쓰러졌다』고 고함을 치자 하오의 편집국은 발칵 뒤집혔다. 워싱턴특파원의 일보는 이래서 세계적 대통신보다 빨리 서울 데스크로 보내져 호외제작작업이 즉각 시작됐다.
○…비록 최후의 순간에 불발로 끝나긴 했지만 런던특파원이 감행한 암호명『호두작전』은 상당한 위험까지 각오한 모험이었다. 북아일랜드사태는 단식투쟁중이던「보비·샌즈」의 옥중 아사로 유혈사태로 발전됐다. 데스크는 런던특파원에게 에이레공화군(IRA)조직의 지도급 인사와의 단독회견을 지시했다.
누가 보아도 동양인이 분명한 특파원은 택시운전사를 통해 IRA단원을 안다는 어떤 남자를 만났다. 취지를 이해하고 회견주선에 동의한 그는 자기집 전화번호를 주며 이틀뒤에『호두를 구해놓았느냐』고 물으라고했다.
호두를 구해 놓았다면 회견주선이 성공됐다는 뜻으로 미리 암호를 정했다. 이틀후 그는『호두를 사놓았으니 어디어디로 몇시까지 나오라』고 했다. 약속된 시간에 그 장소로 나갔더니 그는혼자서 기다리고 있었다. 마지막순간에 저쪽에서 못하겠다고 한다는 것이었다. 피투성이가된 뒷골목에서 기자는 잠시 망연했다.
○…우리 어부48명이 폴리사리오 게릴라들에 잡혔을 때다. 그들을 직접 만나려고 런던특파원은 런던의 폴리사리오 대표와 접촉을 시도했다. 영국기자를 통해 폴리사리오 대표의 비밀전화번호를 알아내「카말」이란 대표를 찾았다. 분명히 본인인듯 한데도『그사람은 지금 외국에 출장중이다』고 따돌리는 것이었다.
6개월동안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전화를 했으나 대답은 항상 부재중이라며『더이상 전화하지 말라』는 짜증이었다. 그러나 소득이 없었던것도 아니다. 어부들이 석방되기로 결정된날 그는 자진해서 전화를 걸어와 석방소식을 알려주면서 그동안 미안했다고 사과했다. 그는 물론「카말」자신이었다.

<정보탐색에 한계>
○…올해 우리의 대외관계에서 외신데스크를 가장 당혹하게 한것은 60억달러규모의 한일경협문제와 프랑스의 사회당정권출범이다. 경협문제에 대해 동경특파원은 일본신문이나 일본기자들을 통해 그들의 입장설명만 읽고 들었을뿐 우리대사관으로부터는 한마디 배경설명도 받아낼수 없었고, 파리주재 한국대사관은 투표날까지『지스카르신승』을 우리나라특파원들에게 자신있게 말해왔다. 해외공관이 뭔가 잘못돼 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수 없었다.
한일경협문제는 오타와선진7개국 정상회담에 참석했던「스즈끼」(영목선행)수상이 7월23일 귀국길에 샌프란시스코에서『한국으로부터 거액의 경협요청을 받고있다』고 말함으로써 표면화됐다.
일본행정부가 언론과 합작하여 한국정부를 몰아붙이고 있었을때 우리 외무부와 주일공관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고 묻고싶은 심정이었다. 동경특파원들이 경협문제와 관련해 서울로 송고한 기사는 일본신문기사를 앵무새처럼외는 내용이 고작이었다. 안보경협요청의 배경을 설명한 책자가 나온것은 외상회담이 끝나고 각로회담을 코앞에 둔 9월8일이었고 그나마 주일특파원들이 이를 읽어볼수 있었던 것은 10월에 들어서였다. 마치 손발을 묶이고 마구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파리의 해프닝은 대사관의 정보분석 능력에 어떤 한계를 느끼게했다.
「미테랑」사회당당수의 당선이 확정된날 밤 파리시가는 온통 축제분위기였지만 파리주재한국대사관의 공기는 무거웠다.
「지스카르」당선을 점쳤던 그들의 분석이 빗나간데 대한 뉘우침이 없을수 없어서 였을까….

<신경은 휴전선에>
○…『88서울올림픽』이 결정된 서독바덴바덴의 국제올림픽위원회취재는 일본특파원들과의 숨바꼭질의 연속이었다.
한국특파원은 10여명에 지나지않았으나 일본은 60여명이나 되는 매머드였다. 바덴바덴으로 달려갔던 본사 본주재특파원이 회의장 주변에서 일본기자들과 부딪치면 으례『한국이 의외로 바싹 추격하는 것같다』며 우리쪽의 움직임이 어떠냐는 질문을 받는다. 그럴때마다 『표차를 얼마로 줄이느냐가 관심아니냐. 아무렴 일본을 꺾겠어?』라는 한결같은 답변만 되풀이했다.
○…폴란드사태에 관련, 토요일하오 외신데스크의 가슴을 서늘하게한 사건이 있었다. 19일 3판을 거의 마감한 시간에 동경특파원이 급한 전화를 걸어왔다.
일본자위대소식통을 인용, 『북괴군이 휴전선 부근에서 기동훈련중이며 이와관련, 일본기지에 있던 7함대함정들이 한국해역으로긴급 출동했다』는 내용이었다.
미국은 무슨 정보를 갖고 그런 조치를 취했을 것이므로 급히 워싱턴을 국제전화로 불렀다. 그쪽 시간으로 상오2시반. 워싱턴은 잠결에 볼멘 소리로 전화를 받더니 금방 목소리가 긴장한다. 국무성·국방성의 야간당직에 사실확인을 지시했다.
『북괴군의 그런 움직임은 사실이나 그것은 계절적(동계)인 훈련』이라는 연락이 워싱턴에서 왔고 동경특파원은『다만 훈련의 규모가 예년에 비해 큰것』이라고 알려왔다.
동경의 첫 전화처럼 당장 긴박한 상황은 아니어서 안도는 했으나 국제긴장이 높아질때마다 휴전선쪽을 향하는 우리의 촉각은 언제나 예민해지는 것이다.
○…바르샤바의 겨울이 2년6개월만에 대화를 재개한 미소의 군축회담을 다시얼어붙게나 하지않을까하고 세계인들은 근심하고있다. 「위대한 미국의 재건」을 내세운「레이건」대통령의 등장이후 미소관계는 급속도로 냉각됐다. 미국과 소련은 위축의 균형 문제를 놓고 서로 엇갈린 분석으로 설전을 벌이고있다. 마치 냉전시대로 되돌아온듯한 느낌이다.
○…지난 1년동안 한명의 본사해외특파원과 한명의 해외기고가가 교통사고를 당했다. 파리특파원은 프랑스외상과의 회견장소로 가다 자동차에 치였다.
한불수교 90여년만에 처음있는 프랑스외상의 공식방한(4월1∼3일)을 앞두고 당시「프랑스와·퐁세」외상이 한국기자들과 특별회견을 약속했었다.

<잇단 특파원수난>
3월26일 외무성으로 달려가던 파리특파원이 그부근 횡단보도를 지나려는데 신호를 무시하고 달려든 모터사이클에 들이받혔다.
무릎을 다치고 들고있던 취재용 녹음기도 박살났다.
전런던특파원으로 현재 고정칼럼(구주잡기)을 쓰고있는 박중희씨는 지난10월 귀가길에 고속도로에서 충돌사고로 3개월째 입원하고있다. 1주일만에 의식을 회복한 박씨는 고정칼럼의 집필을 걱정했고 두달만에는 구술로 쓴 원고를 본사에 보내오기까지 했다. 이들은 모두 독자에게 봉사하는 기자정신을 곤경에서도 잊지않았다.

<통화료 전국10위>
○…동경특파원의 중요한 일가운데 하나는 바둑취재다. 한국이 낳은 천재기사 조치훈이 일본에서 활약하고 있기때문이다. 그런데 바둑취재에 유감이 많다.
일본의 주요 바둑타이틀은 대부분 신문사에서 주관하고 있다. 이 신문사들이 조치훈이 두는 바둑을 취재하는 한국기자들에게 몹시 인색하다. 바둑이 끝나도 기보를 내주지 않는것은 말할것없고 돈내고 사자고해도 팔지 않는다. 인터뷰를 하려해도 제약을 가한다. 일본기자들이 먼저 인터뷰를 끝내야 만날수 있고 시간제한까지 요구한다.
○…외신데스크들은 거대한 항공모함이나 전략사령부의 상황실근무자와 흡사하다.
새벽이거나 한밤중이든 때를 가리지않고 해외의 취재망을 불러내 국제통신요금 납부액으로 봐도 전국 10위이내에 드는 막대한 비용의 투자를 하고있는 것은 보다 정확하고 보다 생생한뉴스를 제공하려는 노력의 일단이다. 그러한 극성은「사다트」대통령이 피살된 직후 카이로에 파견된 특파원의 기사에서 여실히 증명됐다. 올림픽취재 아테네를 방문하고 막 귀가한 런던특파원은 본사의 지시로 짐을 풀 사이도 없이 런던주재 이집트대사관으로 달려가야했다. 그러나 모든 국경이 폐쇄돼 비자를 발급할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런던특파원은 이집트대사관의 무관과 잘 통하는 한 인사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입국비자를 얻어 타사보다 48시간 앞서 카이로에 도착했다.

<자료만 가방한개>
쉴새없이 쏟아져 들어오는 외신캐스트를 정상적으로 꾸준하게 챙긴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것은 미국의 고공정찰기SR-71에 대한 북괴의 미사일요격사건(8월26일)에서 증명됐다.
미국대통령고문「에드·미즈」가 앞으로 만일 북괴가 같은 도발을 감행한다면 직접 보복을 하겠다는 중대성명을 발표한것은 2판마감시간을 상당히 앞둔 시간이었다. 정상적으로 체크하던 내근자가 기사를 만들어 2판에 크게 실었는데 다른 석간들은 약속이나 한것처럼 빠뜨렸다. 부지런하면 특계한다는것은 외근기자이건 내근기자이건 마찬가지.
폴란드사태에서 항상 정확한 분석기사를 보도한 것이라든지 군사관계기사가 권위를 갖는것은 방대한 자료를 꾸준히 수집 분석하고있는 외신데스크가 있기때문이다. 폴란드 사태 1년4개월동안 매일 쏟아져 들어온 외신캐스트와 각종 간행물의 자료를 체계있게 정리해 놓은것만도 작은가방 한개 분량은 된다. <끝>손주환(국장대리겸 외신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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