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종이 사라졌다, 비디오방 뒤져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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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그는 인터뷰 장소로 굳이 효창운동장을 골랐다. 겸사겸사 이곳에서 열리는 대학축구 U리그 경기를 보고싶다는 이유였다. 아시안게임 우승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을 때건만, 그에게서 ‘마음껏 즐기겠다’거나 ‘푹 쉬겠다’는 생각은 읽을 수 없었다. 오히려 그의 시선은 2년 뒤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 고정된 듯했다.

 이광종(50) 감독. ‘한국의 조세 모리뉴(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첼시 감독)’라는 수식어가 잘 어울리는 지도자다. 화려하지 않은 현역 시절을 보낸 뒤 지도자로 거듭나 끈질긴 노력과 과감한 도전으로 우뚝 선 게 많이 닮았다. 승부처에서 유난히 강하다는 공통점도 있다. 지난 10일 만난 이 감독은 28년 만의 아시안게임 금메달 비결을 묻는 질문에 “냉정하게 판단을 내리고, 그것을 소신 있게 지켜나간 결과인 것 같다”면서 “쉽게 들리겠지만, 실천하긴 쉽지 않았다”며 미소지었다.

 -아시안게임 우승과 한·일전 10경기 무패(8승2무)의 비결을 꼽는다면.

 “나는 죽으나 사나 분석에 답이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친한 축구인들은 나를 ‘비디오방 매니어’라 부른다. 국제대회를 준비할 때 한 번 비디오방(전력분석실)에 들어가면 도통 나오지 않는다는 뜻이다. 한·일전에 강하다는 말을 듣는 것도 결국은 분석의 힘이다. 아시안게임 때도 일본과의 8강전을 앞두고 일본의 예선 3경기와 16강전 비디오를 무한 반복으로 돌려봤다. 세트피스 상황에서 상대팀의 누가, 어느 지점에서, 어떻게 움직이는지 세밀하게 파악하고 경기에 임했다. 비디오방에서 새벽까지 분석하다 잠든 건 셀 수도 없다.”

 -온화하고 합리적이라는 평이 많지만 ‘의리가 없다’는 비난도 받는다던데.

 “ 축구인들의 선수 선발 청탁을 일절 받아주지 않기 때문이다. 클럽팀도 아니고 최고의 선수들이 모이는 대표팀에서 그런 일이 생기면 되겠나. 객관적으로 뽑기 때문에 내 선수들 모두를 끝까지 믿고 사랑할 수 있다.”

 -실력이 엇비슷한 선수 중 한 명을 골라야 할 때는.

 “무조건 투쟁심부터 본다. 포지션을 막론하고 볼에 대한 집착이 강한 선수가 우선이다. 자랑 같지만, 나 또한 현역 시절 ‘볼 키핑 좋은 선수’로 이름을 날렸다. 무릎 연골을 세 번이나 수술했을 정도로 부상도 많았지만, ‘볼을 반드시 내 것으로 만들겠다’는 의지는 변함 없었다. ”

 -‘선수와 지도자의 성공 DNA가 다르다’는 주장에 동의하나.

 “물론이다. 현역 시절의 나는 지나치게 꼿꼿했다. 부당하다 싶으면 가리지 않고 들이받았다. 한때 올림픽 대표팀에 뽑혔는데, 계속 후보 역할만 주길래 당시 감독님께 ‘더 이상 나를 뽑지 말라’고 통보하고 소집을 거부한 적도 있다(웃음). 지도자가 되고 보니 선수 시절의 경험이 약이 됐다. 늘 주전 못지 않게 비주전을 챙기고, 혼낼 땐 중추적인 선수 먼저 야단친다. 감독은 상대 지도자와의 두뇌싸움 못지 않게 소속팀 선수들과의 심리 싸움에서도 이겨야 한다. 선수로는 잘 하지 못했지만, 지략으로 명장 반열에 오른 모리뉴 감독의 성공 사례에서 위안과 영감을 얻는다.”

 -리우 올림픽대표팀 감독직을 수락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잠깐 말이 없다가) 그래도 누군가는 해야 할 일 아닌가. 걸출한 선수가 눈에 띄지 않는다거나, 2년 전 동메달을 딴 게 부담스럽다는 이유로 여러 지도자들이 고사했다는 말을 들었다. 제의를 수락하면서 ‘실패할 수도 있다’고 마음부터 비웠다. 다만, 준비 과정은 내 원칙들을 철저히 지키며 최선을 다 하겠다 ”

송지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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