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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 닥터의 조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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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6호 30면

명의(名醫)는 유명한 의사를 일컫는다. 하지만 유명한 의사가 곧 좋은 의사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마케팅 활동으로 유명세를 탄 의사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중앙SUNDAY와 함께 1년 동안 명의보다는 ‘훌륭한 의사’를 찾아 떠났다. 훌륭한 의사는 무엇일까? 송나라 의학 책 『성혜방』에 따르면 ‘작은 의사는 병을 고치고, 중간 의사는 사람을 고치고, 큰 의사는 나라를 고친다’고 했다. 큰 의사가 되라는 말 같지만 사실 치병(治病)도 제대로 하기가 어렵다. 의사에겐 치병과 치인, 치국이 같은 의미일 수도 있다.

필자는 훌륭한 의사가 어떤 사람인지 의사들 스스로 판단하게 했다. 해당 병을 전공하는 교수들에게 “당신의 가족이 그 병에 걸리면 누구에게 보내고 싶은가?”를 물은 뒤 최근 진료·연구 실적을 반영해서 좋은 의사를 추천받았다. 연인원 1200여 명이 추천에 응했고 30명의 국내 각 분야 베스트 닥터가 탄생했다. 여성 내분비질환의 명의인 연세대 의대 이병석 학장은 대통령 주치의여서 인터뷰를 고사하다가 사퇴하자마자 응했다.
베스트 닥터는 공통점이 있다.

첫째, 깊고 넓었다. 대부분 문사철(文史哲)의 소양이 있고 시사에 박식했다. 의사가 사람의 심신과 상대하는 전문인이기 때문에 인문학이 바탕인 직업의식이 없으면 최고가 되기가 어려울 것이다.

둘째, 일중독에 가까울 정도로 일을 사랑하고 시간을 아꼈다. 대학 시절 밤새 포커 게임을 즐겨 친구들을 우수수 낙제시키고 자신만 A학점을 받은 서울대병원 방영주 교수(항암치료)처럼 ‘천재형’도 있지만 그 천재조차도 결국엔 ‘노력형’에 합류했다. 연세암병원 송시영 교수(담췌장 질환), 한양대 류마티스병원 배상철 원장 등은 도대체 언제 쉴까 궁금할 정도였다.

셋째, 늘 환자를 생각했다. 서울아산병원 이승규 교수(간 수술)는 어머니의 장례식날 밤 수술대로 향했다. 배상철 원장은 장인상을 치르면서도 계속 원격으로 환자를 봤다.

이런 조건들이 필수 조건이라면 선택 조건도 있다. 서울대병원 정회원 교수(뇌종양 수술)는 “자기 또는 가족이 크게 아파 본 것이 명의의 조건 중 하나”라면서 “고교 때 여동생이 뇌막염을 앓은 것이 내가 좀 더 좋은 의사가 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경북대병원 김용림 교수는 의대 본과 2학년 때 급성신증후군을 앓은 것이 신장병의 최고 대가가 되는 바탕이 됐다.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허승곤 교수(뇌혈관질환 수술)는 초등학교 4학년 때 복통 때문에 병원에 갔다가 씻은 듯 나았던 경험 덕분에 의사를 꿈꿨고 최고의 의사가 됐다.

다수의 베스트 닥터들이 대체로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지만 찢어지게 가난한 환경을 극복한 경우도 있었다. 연세대 강남세브란스병원 박정수 교수는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집안이 쫄딱 망해서 다른 식구들은 빚쟁이를 피해 시골로 가고 혼자 친구 집에서 기거하면서 공부했다. 중2 때부터 입주 과외를 하면서 공부해 갑상선 수술의 최고 대가가 됐다.

최근엔 베스트 닥터가 정년을 연장해서 근무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박정수(70)·이승규 교수(65)와 경희대병원 배대경(68·무릎 수술) 교수 등은 정년 이후 병원의 간청에 따라 수술 칼을 잡고 있다.

우리나라엔 19세기 말에 서양의학이 본격적으로 들어왔다. 2010년대 들어와선 국제학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국제 임상시험을 주관하는 의사들이 나오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바뀌지 않은 진리가 있다. 바로 최고의 의사는 자나 깨나 환자 생각을 한다는 점이다. 중앙SUNDAY와 함께 30명의 베스트 닥터를 찾아다니면서도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 의료의 비약적 발전은 공짜로 이뤄지지 않았다. 불철주야 환자를 생각하며 연구와 치료에 매진한 베스트 닥터들의 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성주 코메디닷컴 대표 stein33@korme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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