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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식 '유럽 합중국' 꿈 물거품 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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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 프랑스 우익계 일간지 르 피가로의 30일자 1면 사진기사. 유럽 지도 위에 큰 활자로 ‘농(NON·아니오)’이라고 쓰여 있다. 전날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유럽헌법안 비준이 부결된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파리 AP=연합]

프랑스의 유럽헌법안 부결로 지난 50년간 계속돼온 유럽 통합 작업이 최대 난관에 봉착했다. 프랑스와 독일이 두 차례 세계대전이 가져온 참극에서 벗어나기 위해 '유럽합중국' 구상을 논의하기 시작한 이래 유럽 통합은 부단히 확대돼 왔다. 지난해 동유럽 10개국의 가입으로 사실상 전 유럽 통일이 눈앞에 다가왔다. 그런데 1년 만에 유럽 통합의 결정적 틀이 될 헌법안을 통합의 주역인 프랑스가 거부했다. 유럽의 꿈이 흔들리고 있다. 왜 프랑스 국민은 거부했는가. 유럽과 유럽헌법은 어디로 갈 것인가. 궁금증을 Q&A로 정리했다.

#1. 유럽헌법이 뭐기에.

"유럽헌법은 경제적으로 통합된 유럽 각국을 정치적으로 통합하기 위한 유럽연합(EU)의 기본틀이다. 헌법이 채택될 경우 EU는 25개 회원국을 거느린 합중국과 같아진다. 미국처럼 완전한 국가라고 할 수는 없지만 유럽이 꿈꿔온 강대 연합국의 형태가 갖춰지게 된다. 정치적 통합이 절박해진 것은 지난해 동유럽 10개국의 가입 때문이다. 지금까지 EU는 지난 50여 년간 체결된 많은 조약의 틀에 의해 운영돼 왔다. 그런데 동유럽의 가입으로 회원국이 25개국으로 늘어나면서 의사 결정 방식을 시급히 효율화할 필요가 생겼다. 이에 따라 기존 협약들을 체계적으로 재정리하고 미래지향적으로 발전시킨 법안이 유럽헌법이다. 가장 큰 특징은 EU 집행부를 연방정부처럼 강화한 것이다. 유럽헌법은 EU를 대표하는 상임의장격인 대통령과 외무장관직을 신설했다. 헌법안이 채택되면 EU 대통령과 외무장관이 유럽합중국을 대표한다. 장기적으로 회원국은 미국의 주(州)처럼 된다. 그러나 이번 프랑스의 헌법안 부결로 유럽합중국으로 가는 길에 급제동이 걸렸다. 유럽이 갈망해온 미국식 강대국의 꿈은 무산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2. 프랑스는 왜 반대했나.

"일자리를 뺏긴다는 위기감이 크게 작용했다. 프랑스의 실업률은 10%를 넘는다. 유럽이 하나로 통합되면 프랑스에 있는 공장이 인건비가 싼 동유럽권 국가로 이전해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팽배해 있다. 값싼 동유럽권 노동력이 쏟아져 들어오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감도 작용했다. 통합으로 프랑스의 주권이 침해받지 않을까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았다. 헌법안이 채택될 경우 EU의 결정은 개별 국가의 결정보다 우위에 있게 된다. 현재 협상이 진행 중인 이슬람 국가 터키의 EU 가입 문제도 투표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현재 프랑스에 살고 있는 500만 명 이상의 이슬람 교도는 프랑스 사회에 동화되지 못해 범죄를 저지르는 등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 그런 와중에 터키가 가입한다는 소리가 나오자 프랑스인들이 헌법안에 냉담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3. 다른 국가에 미칠 영향은.

"원칙적으로 25개 EU 회원국이 찬성해야 발효된다. 스페인.독일 등 9개국은 찬성했다. 나머지 16개국은 앞으로 국민투표나 의회 비준 과정을 통해 결정한다. 그런데 프랑스에서 처음 부결되면서 다른 국가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당장 다음달 1일 실시되는 네덜란드 투표에서도 부결될 것이 확실시되고 있다. 최근 네덜란드에서 실시된 여론조사에선 반대가 찬성보다 많았다. 지난 28일 여론조사에 따르면 프랑스에서 헌법이 부결될 경우 네덜란드 투표에서 헌법 반대율이 60%를 기록할 것으로 예상됐다. 프랑스에서 예상했던 것보다 더 큰 표차로 부결됨에 따라 네덜란드 투표에서의 부결 가능성은 한층 더 높아졌다. 유럽 통합에 가장 적극적인 초기 멤버 프랑스와 네덜란드가 통합을 거부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게 된 것이다. EU에 가장 비협조적인 영국도 프랑스의 부결을 이유로 내년 상반기로 예정된 국민투표를 취소할 가능성이 크다."

#4. 헌법안은 물거품이 되나.

"아직 불투명하다. 현재의 헌법안이 원안대로 채택될 가능성은 없어졌다. 그렇다고 헌법안의 내용이 완전히 물거품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일단 프랑스가 EU와 협상, 헌법안을 조금 바꾼 다음 재투표해 통과시키는 방법이 있지만 그 가능성은 작다. 찬반 선거운동 과정에서 마누엘 바로수 EU 집행위원장과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은 배수진을 치는 심정으로 '재협상은 없다'고 선언했다. 또 부결하는 국가가 많아질 경우 모든 회원국에서 재협상을 벌일 수는 없다. 재협상이 없을 경우 재투표는 불가능하다. 대신 EU 회원국들은 헌법안의 주요 골자를 별도 협약으로 채택할 것으로 예상된다. 예컨대 EU 대통령은 뽑지 않더라도 외무장관직을 신설하는 협약을 체결할 수 있다. EU 권한을 다소 줄이는 대신 회원국 주권을 조금 더 인정하는 방식으로 강도 낮은 정치적 통합이 가능하다. 이 경우 현재의 EU보다는 강한 연합체가 되지만 미국 같은 합중국이 될 수는 없다."

#5.유럽통합과 관련 부결된 전례는.

"모두 5번 있었다. ① 1954년 프랑스 하원이 유럽 6개국의 군사 유대를 강화하려는 유럽방위 공동체 조약을 부결시켰다. 이 사태로 유럽 지도자들은 경제 통합을 대안으로 선택해 57년 유럽경제공동체(EEC)를 창설했다. ② 65년 샤를 드골 프랑스 대통령은 EEC 각료 이사회 의사 결정 방식을 만장일치에서 다수결로 전환하는 방안에 반대했다. 이후 회원국들은 국가적 중대사로 여겨지는 사안에 대해서는 거부권을 갖게 됐다. ③ 92년 덴마크가 국민투표에서 마스트리히트 조약을 부결시켰다. 덴마크는 재협상을 거쳐 이듬해 2차 투표에서 비준했다. ④ 96년 EU가 광우병 발병을 이유로 영국산 쇠고기 수입을 금지하자 존 메이저 영국 총리가 EU 정책 결정에 협조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⑤ 2001년 EU 제도를 간편화하고 동유럽권의 가입을 준비하려는 니스 조약이 아일랜드에서 부결됐다.

#6. 논란거리로 부상한 터키의 EU 가입 전망은.

"불투명해졌다.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통합 반대 여론에서 가장 감정적인 대목이 반 이슬람이기 때문이다. 이슬람 국가 터키는 EU 확대의 마지노선으로 드러났다. 터키는 기존 회원국들의 정치적 통합을 가로막는 결과를 낳았다. 특히 네덜란드의 경우 이슬람의 여성 학대를 고발하는 다큐멘터리를 만든 작가가 백주대로에서 피살된 이후 국민 여론이 싹 돌아섰다. 가장 많은 무슬림이 살고 있는 프랑스도 터키 가입에 민감하다. 유럽 통합은 유럽 기독교 국가만의 연대로 끝날 수도 있다."

런던=오병상, 파리=박경덕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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