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전수진의 한국인은 왜

자막이 너무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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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전수진 기자 중앙일보 팀장
전수진
정치국제부문 기자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부인 미셸의 대화는 존댓말로 옮겨야 할까. 반말이 나을까. 얼마전 미국 드라마 ‘하우스 오브 카드’의 우리말 자막을 보면서 궁금해졌다. 워싱턴 정가의 암투를 그린 이 드라마의 여러 버전 중 기자가 받은 파일은 유교사상으로 중무장한 분이 작업한 듯했다. 주인공 프랭크 언더우드 상원의원보다 어리거나, 지위가 낮거나, 부인이면 그에게 무조건 존댓말을 쓰도록 번역됐다. 정치적 동지에 가까운 부인 클레어와의 관계도 자막 탓에 수평에서 수직적 관계로 변질된다. 언더우드와 노조 지도자 마티의 설전에서도 자막은 의원에게만 반말을 허한다. 마티가 “프랭크”라고 불러도 자막은 “의원님”이고 “너 후회할 거야”라며 주먹을 날려도 자막은 “의원님 후회하실 겁니다”로 깍듯한 ‘을’의 자세를 유지한다.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라는 영화의 원제처럼 ‘번역에서 길을 잃은(Lost in Translation)’ 느낌이다.

 돌이켜보면 ‘하우스 오브 카드’만 그런 것도 아니다. ‘주말의 명화’에서 남성 등장인물이 여성들에게 “~하오”체를 구사하는 게 당연지사였던 때도 있다. 초등학교 때 국어 선생님께 “왜 영화에서 여자들은 항상 존댓말을 하나요”라고 물었다가 “쓸데 없는 질문 할 시간에 산수 문제나 더 풀어라”며 꿀밤을 맞기도 했으니.

 기자만 이런 꼬인 생각을 하는 건 아닌 것 같다. 한국 영화인데 한국어 자막이 필요한 영화 ‘다른 나라에서’는 영어 대사와 한국어 자막의 불일치를 영화적 장치로 등장시킨다. 동명이인 캐릭터 안느를 두고 ‘한국인 남자와 바람난 프랑스인 유부녀’ 안느의 영어 대사의 자막은 존댓말로, 콧대 높은 영화감독 안느의 대사는 반말로 차별을 둔다. 꿈보다 해몽일지 몰라도 문화 차이를 드러내기 위한 설정이 아닐까.

 번역에서 길을 잃는 현상은 취재 현장에서도 발생한다. 지난해 9월 아르헨티나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 현장에서 신임 위원장으로 선출된 토마스 바흐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그의 ‘절친’ 러시아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건 전화였다. 통화 내용을 지면에 맞도록 점잖게 “토마스, 축하하네. 앞으로 잘해보세”라고 옮겼지만 어딘가 께름칙했다. “야, 토마스, 완전 축하해. 잘해보자고”가 더 맞지 않았을까 싶어서다.

 그나저나 오바마 부부의 대화는 어떻게 옮기는 게 맞을까. 미셸 여사가 오바마 대통령에게 금연을 권하며 했다는 말은 “자기야 담배 끊어”일까, “여보, 담배는 끊으시는 게 어떠실까요”일까. 도무지 모르겠사옵나이다.

전수진 정치국제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