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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만지고 먹고 타며…기술이 아닌 자동차 예술·철학에 빠진다

중앙일보

입력

"신나고 설레죠. 입양하는 막내 동생 보러가는 기분이랄까요."

들뜬 표정이 영락없는 어린아이였다. 독일 볼프스부르크 아우토슈타트에서 만난 20대 청년 라이스 라이나르의 표정이 그랬다. 그는 아버지·어머니와 같이 이곳을 찾았다. 사겠다고 예약한 소형 해치백 승용차를 직접 찾기 위해서였다. 그의 가족이 사는 도시는 뒤셀도르프. 무려 400㎞나 떨어져 있지만 “덕분에 오랜만에 온 가족이 놀러올 수 있었다"고 했다.

이런 풍경, 우리에겐 낯설다. 한낱 기계 덩어리인 자동차를 '입양하는 가족'이라고 운운하는 것도 그렇고, 그 자동차를 받기 위해 온 가족이 총출동하는 모습도 그렇다. 무엇보다 신차를 배송받지 않고, 직접 찾으러 가는 게 영 이상했다. 삭막하기 짝이 없는 자동차 공장에 뭐 볼 게 있느냐는 말이다.

이런 고정관념을 날려 버린 게 독일 폴크스바겐이 만든 아우토슈타드(Autostadt)다. 폴크스바겐의 본사이자 신차 출고장과 자동차와 관련된 볼거리·놀거리를 묶어 놓은 전 세계 최초이자 최대의 자동차 테마 파크다. 2000년 개장 이후 자동차 매니어의 성지로 불렸다. 이곳이 최근 새삼 주목을 받게 된 건, 현대자동차가 서울 삼성동 한전 부지를 10조원이 넘는 돈을 쏟아부어 인수하면서 “한국의 아우토슈타트로 만들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어떤 곳이기에 현대차가 벤치마킹하겠다는 것인가. 아우토슈타트 현지를 중앙Sunday가 찾아갔다.

● 어린이도 운전 체험할 수 있어

25일(현지시간) 오전, 하노버 공항에서 한 시간 남짓 자동차를 타고서 아우토슈타트 안에 있는 리츠 칼튼 호텔에 도착했다. 멀리서 오는 이들이 묶을 수 있도록 최고급 호텔을 건립해 놓았는데, 몇 달 전 예약해야 방을 구할 수 있다고 했다.

언뜻 살펴봐도 자동차는 좀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자동차 로고도 없었다. 그렇다고 테마 파크 분위기에 맞는 짜릿한 놀이기구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한적한 풀밭 사이에 독특한 외형의 건물이 군데군데 있었고, 그 사이로 잔잔한 호수가 흘렀다. 꽤 근사한 대형 미술관에 온 듯싶었다.
본부에 해당하는 그룹포럼(Group Forum)을 우선 들렀다. 외관은 투명 유리였다. 1층에 들어가자 중앙 천정에 지름 12m의 원형 조형물이 매달려 있었고, 아래 거울 바닥엔 지구본 모양의 수십 개 구(球)들이 있었다. 전세계 차량 대수, 배기가스 배출량, 교통 체증 등을 담아낸 일종의 설치 미술품이었다.

어린이들의 자동차 놀이터 역할도 톡톡히 했다. 소형차를 갖고 만지고 주무르며 타 보는 건 기본이요, 5~11세 어린이 면허증 취득 프로그램도 있었다. 폴크스바겐 비틀을 본 떠 만든 모형차로 아이들이 직접 운전 교육을 받는 실습 코스도 마련돼 있었다.

한 달 전 새롭게 오픈했다는 '오토워크'는 차량을 7개 부분으로 분리시키고, 예리하게 잘린 각 단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새삼 자동차 생산 과정이 얼마나 정교하고 여러 사람의 손이 필요한지를 역설적으로 증명했다. '레벨 그린'(Level Green)이란 공간도 특이했다. 입체형 터치 스크린에선 "내가 먹는 바나나 하나에 총 몇 킬로그램의 물이 사용되는지" "생산과 환경은 늘 충돌하는지"와 같은 한편으론 뜬금없지만 한번쯤 생각해 볼 만한 질문이 이어졌다. 그럴듯한 인문학 강좌를 듣는 기분이었다. 이산화탄소를 배출해내는 자동차 회사가 친환경과 지속가능성을 줄곧 주창하는 게 단순히 이미지 세탁만은 아닌 듯싶었다.

● 독일 10대 관광 명소로 꼽혀

본부 건물을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반나절은 후딱 지나쳤다. 그래도 아우토슈타트의 최고 명물은 카 타워(car tower)였다. 고객에게 전할 새 차가 보관되는 장소인데 20층짜리 48m 쌍둥이 빌딩이다. 한 빌딩에 400대씩 총 800대가 보관될 수 있다고 한다. 7인용 승강기를 타고 20층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순간은 마치 공상과학영화의 한복판에 들어온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콘크리트 바닥에 있는 차 한 대를 빼는 데엔 15초가 걸린다고 한다.

람보르기니·부가티·포르셰 등 이름만으로도 매니어를 흥분시키는 8개 브랜드 전시관도 독특했다. 자칫 딱딱할 수 있는 자동차 기능과 성능 전달을 몽환적인 공간 활용으로 풀어냈다. 자동차 박물관도 빼놓을 수 없다. 1880년대 이후 엔진과 디자인 역사상 의미 있는 클래식카 200여 대가 망라돼 있다. 한대에 수십억원하는 차를 실컷 구경할 수 있는, 눈이 호강하는 시간이었다.

정적인 눈요기만 하는 게 아니었다. 드라이빙 익스피리언스에선 인공적으로 만든 오프로드·비포장도로를 SUV 차종으로 체험했고, 미래의 자동차로 할 수 있는 전기차를 타고 외부로 달려나가는 코스도 있었다.

원래 볼프스부르크에는 폴크스바겐의 본사와 공장만 있었다. 1994년 그룹의 페르디난트 피에히 의장이 본사 및 공장을 찾는 고객은 물론 일반인들도 친근하고 흥미로운 곳으로 여길 자동차 테마 파크를 구상했다. 그러자 "너희가 디즈니냐, 웬 놀이시설이냐"라는 비아냥이 적지 않았다. 마침 인근 하노버 시가 2000년 엑스포 개최권을 획득하자 폴크스바겐 그룹은 아우토슈타트 프로젝트를 결정했다. 그리고 2년 후인 2000년 6월 문을 열었다.

아우토슈타트 글로벌 홍보책임자인 리노 산타크루즈는 "우린 고객과 소통하는 새로운 문법을 창출해냈다"고 말했다. 개장 이후 해마다 200만 명이 방문한다. 다음달이면 누적 방문객 3000만 명을 돌파한다. BMW·도요타 등이 벤치마킹하며 자동차 테마파크 붐을 이루기도 했다. 무엇보다 독일 관광청이 아우토슈타트를 10대 관광 명소의 하나로 선정했다. 인구 12만 명의 독일 중북부 소도시 볼프스부르크가 황량한 자동차 생산지에서 세련된 자동차 문화 도시로 탈바꿈한 것이다. 지역 경제 발전에도 크게 기여하고 있다. 산타크루즈는 "아우토슈타트 내 10개 레스토랑에서 쓰는 고기와 유기농 채소는 모두 볼프스부르크 인근에서 나오는 것이고, 1500여 명 직원도 대부분 이 지역 출신"이라고 전했다.

현대차가 한전 부지를 인수해 승자의 저주에 걸릴지도 모른다는 건 이들에게도 익히 알려진 소식이었다. 폴크스바겐 마케팅이사인 크리스티안 부머는 "한전부지 인수는 과감하면서 영리한 선택이었다"며 "다만 12개 브랜드를 가진 폴크스바겐과 달리 현대차가 2개 브랜드만 갖고 있으며, 역사가 그리 길지 않다는 건 고민일 것"이라고 말했다. 산타크루즈 역시 "독창적인 콘텐트를 담아낼 수 있느냐가 핵심"이라고 단언했다.

독일 볼프스부르크=최민우 기자 minw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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