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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전' 이몽룡은 실존 인물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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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전』속 이도령 ‘이몽룡’은 실존인물이 모델이다. 『춘향전』이 지어진 시기는 지금까지 알려진 것처럼 18세기 조선 영·정조 때가 아니라 그보다 100년 앞섰다.’

 이런 일부 학자의 주장이 공식적인 학계의 검증을 받게 됐다. 이몽룡의 실존모델이라는 성이성(1595∼1664)의 후손이 관련 유물 700점을 경북도립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한 게 계기다. 국학진흥원 측은 “성이성과 이몽룡의 관련성 연구를 시작했다”고 24일 밝혔다.

 기탁한 유물은 성이성이 과거에 급제해 받은 어사화를 비롯해 호남에서 암행어사로 활동하며 일기처럼 쓴 ‘암행록’ 등이다. 어사화를 보관하는 어사화판에는 일반적으로 적혀 있는 ‘문과 급제’등의 내용 대신 남원 광한루(廣寒樓)를 연상케 하는 ‘광한향악(광한루에 퍼지는 꽃향기)’이라는 네 글자가 적혀 있다.

 성이성이 이몽룡의 실존모델이라는 학설은 연세대 설성경(70·국문학) 명예교수가 1999년 처음 내놨다. 성이성 자손 집안에 내려오는 유품과 조상에 대한 얘기를 바탕으로 한 연구였다. 설 교수와 성이성 자손들이 주장하는 이몽룡과 성이성의 관련성은 이렇다. 홍문관 교리, 진주목사 등을 지낸 성이성은 17세기초 남원부사였던 부친을 따라 열 두살 때부터 열 여섯 살까지 4년을 남원에서 보냈다. 열 여섯 살은 소설 속 이몽룡이 성춘향과 만난 시기다.

 남원에서 성이성은 조경남(1570~1641)에게 문장을 배웠다. 조경남은 임진왜란부터 병자호란까지의 사회상을 『난중잡록』 『속잡록』 등으로 엮은 인물이다. 광주목사가 된 부친을 따라 남원을 떠난 성이성은 1627년 문과에 급제했다. 1639년과 1647년 두 차례 암행어사가 돼 남원에 왔다.

두번째 암행어사로 왔을 때의 일을 적은 ‘암행록’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날이 저물어 아전과 기생을 모두 물리치고 광한루에 앉았다. 소년시절의 일을 거듭 회상하고는 밤이 깊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여기서 ‘소년시절의 일’이 바로 성춘향과의 만남을 뜻한다는 게 설 교수와 성이성 후손들의 주장이다. 설 교수는 “성이성이 1차 암행어사 때 글 스승인 조경남을 만나 소년시절의 일을 얘기했고, 문장가인 조경남이 이를 바탕으로 1640년께 춘향전을 지었다”고 한다. 성이성을 이도령으로 바꾸고, 춘향의 성씨를 성이성과 같은 ‘성’으로 한 뒤 탐관오리를 대표하는 가상인물 변사또를 등장시켜 춘향전을 지었다는 설이다.

 성이성의 4대손 성섭(1718∼1788)이 지은 『교와문고(橋窩文藁)』에는 이런 대목도 나온다. ‘우리 고조(성이성)께서 암행해 한 곳에 이르니, 호남 12읍 수령이 큰 잔치를 베풀어 술판이 낭자하고 기생의 노래가 한창이었다. 어사가 걸인 행색으로 들어가 지필을 달라 하여 樽中美酒千人血/盤上佳肴萬姓膏/燭淚落時民淚落/歌聲高處怨聲高(준중미주천인혈/반상가효만성고/촉루락시민루락/가성고처원성고)라 적고… 이어 어사 출두가 외쳐지고…’

 ‘준중미주…’는 춘향전에도 나온다. 춘향전에는 ‘준중(樽中·술동이)’이 ‘금준(金樽·금술통)’으로 바뀌었을 뿐 나머지는 꼭같다. 해석하면 이렇다. ‘동이의 술은 천 사람의 피요/상 위의 안주는 만 백성의 기름이라/촛농 떨어질 때 백성 눈물 떨어지고/노래소리 높은 곳에 원성 소리 높더라.’

 국학진흥원에 유물을 기탁한 성이성의 13대 종손 성기호(73)씨는 “조상이 이몽룡이라는 말을 어렸을 적부터 들었다”며 “다만 사랑 타령하는 인물로 그려지는 것이 뭣해 말을 아꼈다“고 했다.

 경북도는 26~27일 성이성 종가가 있는 봉화군 청소년센터에서 기탁 유물 전시회를 한다. 이 자리에서 설 교수는 성이성에 대한 추가 연구결과를 발표한다. 과거급제 행차 등을 재현하는 ‘이몽룡 축제’도 함께 열린다.

봉화=송의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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