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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우울증 치료 못하면 우울한 사회 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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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우종민
인제대 서울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바야흐로 백세 장수시대다. 오래 사는 시대에는 몸의 건강만큼이나 마음의 건강이 중요하다. 사실 정신이 건강하지 못하면 육체적인 건강에도 문제가 잘 생긴다. 마음이 건강하면 오래 살수록 즐겁고 감사하다. 마음이 괴롭고 우울하면 삶이 길어질수록 더 지옥 같고 힘들 뿐이다. 당연히 자살 위험도 높아진다.

 질병관리본부에 따르면 우리나라 성인 8명 가운데 한 명이 지난 1년 새 우울증을 앓았다. 여성일수록, 나이가 들수록, 저소득층일수록 우울증에 취약했다. 우울증이 워낙 흔한 질환이 됐고, 그 사회적 손실도 계속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우울증을 앓고 있으면서도 정신과적 치료를 받거나 상담을 받은 비율은 9.7%에 불과하다. 2012년 국민건강보험공단의 자료를 보면 실제 치료를 받은 우울증 환자는 58만6706명이다. 전 국민의 1% 남짓이다. 우울증은 ‘숨은 환자’가 훨씬 더 많다는 뜻이다.

 그제는 통계청의 2013년 사망 원인 통계가 발표됐는데, 한국의 자살률은 상승 일변도다. 10년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1위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모든 자살의 50~70%가 사망 직전에 우울증 상태를 거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우울증 대책 없이 자살률을 끌어내리기는 어렵다.

 우울증 치료율을 높이고 자살률을 낮추는 것은 이제 국가적인 어젠다로 삼아야 한다. 말로만 떠들지 말고 실질적인 조치를 해야 한다. 자살 예방을 위해 지하철 스크린도어를 만드는 데 1조원이 넘는 돈을 쓰고 있다. 어찌 모든 걸 시설 공사로만 해결하려고 하는가.

 우선 환자들이 병원에 쉽게 갈 수 있도록 보험 가입 차별을 없애야 한다. 우울증에 대한 사회적 편견도 해소해야 한다. 우울증은 치료법도 없는 희귀한 난치성 질환이 아니다. 항우울제만 잘 복용해도 대부분 가라앉힐 수 있다. 선진국에서 일반화된 전자파동요법과 경두개자기장자극술 등의 의학적 치료를 우리나라에서도 얼마든지 받을 수 있다. 각종 정신치료기법도 많이 개발돼 있다. 의료진의 수준도 세계 어디 내놓아도 손색이 없다. 그런데 왜 치료를 받지 않고 자살에 이른 환자가 그렇게 많아야 하는가? 그것은 환자와 치료 사이에 장벽이 있기 때문이다. 먼저 이것을 없애야 한다.

 정신건강의학과 진료를 받은 환자가 보험 가입을 거부당하는 관례는 반드시 시정돼야 한다. 우울증이나 스트레스, 불면증이 보험에서 제외돼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합리적 근거도 없다. 이런 사람들일수록 자기 건강을 염려하기 때문에 더 열심히 자기 관리를 하고 사망률이 더 낮다는 데이터도 있다. 몸의 병이나 마음의 병이나 모두 똑같은 질병이다. 불합리한 차별 때문에 가벼운 마음의 병을 앓는 수백만 명의 환자가 진료를 기피하며, 지금도 병을 키우고 있다. 머리 MRI를 찍어야 하는데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처방을 받으면 실손보험에서 지급을 하지 않아 차트의 병명을 바꾸든지 진료과를 바꿔 달라는 환자들이 넘쳐난다. 이 때문에 진료가 왜곡되고 있다. 자살률을 낮추려면 이런 차별부터 해결해야 한다.

 외래통원치료도 활성화해야 한다. 건강보험의 정신건강 분야 지출 중 외래통원치료가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적다. 보험 지출의 대부분을 만성 입원환자의 관리비로 지출하고 있다. OECD 자문단도 이 문제점을 지적했다. 환자들이 외래진료를 쉽게 받도록 해 줘야 한다. 정부는 비용 부담을 줄여 주고, 병원 방문을 꺼리게 만드는 사회적 차별과 편견을 해소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환자 스스로 노력할 일도 있다. 가벼운 우울증에는 운동이 큰 도움이 된다. 30분 이상 땀을 흘리는 운동을 일주일에 3회 이상 규칙적으로 하는 경우 우울증에 걸릴 확률이 15분의 1로 줄어든다. 운동을 하면 대뇌에서 감정 조절을 담당하는 신경전달물질이 활발해져 기분이 좋아진다. 격렬한 운동을 하면 웃음 호르몬으로 알려진 엔도르핀의 분비도 증가한다.

 이왕이면 실내보다 야외활동이 더 좋다. 우리나라 국토의 3분의 2가 산과 숲이다. 숲은 생명의 보고(寶庫)로서 자연적인 치유능력을 갖고 있다. 숲에서 나무를 보고 느끼며, 물소리·새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상쾌한 피톤치드 냄새를 맡으면 저절로 스트레스가 낮아지고 심신이 이완되며 우울감이 감소한다. 오전이나 낮에 햇볕을 쬐면 수면의 질이 높아지고 계절성 우울증의 기분 조절에 도움이 된다. 숲에서는 한 번 반사가 된 적당한 강도의 햇볕을 쬐기 좋다.

 우울증 환자는 의욕이 없고 비관적이기 때문에 치료에 소극적이기 쉽다. 이럴 때 주변에서 잘 도와줘야 한다. 그런데 옆에서 “약을 오래 먹으면 치매가 온다”느니 “중독이 된다”느니 “우울증은 다 마음먹기 나름”이라는 둥 잘못된 선입견을 자꾸 들먹이면 가뜩이나 마음이 약한 환자는 치료받을 시기를 놓친다. 스스로 우울증이라고 생각되면 남의 이목에 신경 쓰지 말고 빨리 점검을 해 보자. 병을 키우면 나만 손해다. 우울증은 영원하지 않다.

우종민 인제대 서울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