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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쳐나는 클래식 신동 ‘10대 되면 부모 원망하며 괴로워해…’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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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언 왕(6)은 2013년 5세의 나이로 카네기 홀에서 연주했다. 사진은 같은 해 5월 ‘엘렌 드제네레스 쇼’에 출연해 연주하는 모습.

위안판 양은 요즘 스코틀랜드 순회 공연 준비로 매우 바쁘다. 쇼팽 환상곡 F단조, 베토벤과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소나타를 연습 중이다. 또 나중에 있을 중국 공연을 위해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과 프로코피에프 피아노 협주곡 1번도 연습하고 있다. 위안판의 나이는 이제 17세다.

“여섯 살에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고 위안판은 말했다. 영국 에든버러의 중국인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그저 음악이 좋아서 피아노 연습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는 BBC 젊은 음악가상(피아노 부문)을 받았고 작곡가로도 활동한다. 위안판은 기량이 뛰어난 연주자일 뿐 아니라 재능 있는 예술가다.

요즘은 어린 나이에 위안판처럼 뛰어난 재능을 나타내는 클래식 연주자가 많다. “최근엔 연주자들이 과거 어느 때보다 더 어린 나이에 더 높은 수준의 음악활동을 보여준다.” 뉴욕 줄리아드 음대 피아노 교수 요헤베드 카플린스키의 설명이다. “일종의 올림픽 신드롬이다. 기록은 깨지기 위해 존재한다는 식의 사고가 작용한다.”

물론 다른 사람의 성취를 뛰어넘고 싶어 하는 것은 인간 본성의 일부다. 이런 집단적인 경쟁심 덕분에 수세기 동안 사회가 발전해 왔다. 이제 그런 경쟁심이 음악계에 파고 들어 올림픽 스타일의 음악활동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요즘은 열 살짜리 어린이들이 쇼팽의 에튀드를 녹음한다”고 카플린스키가 말했다. “내가 어렸을 때는 성인이 되기 전에 그런 곡을 연주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리는 까다로운 쇼팽의 에튀드나 피아노 협주곡을 통째로 외워서 치는 어린 모차르트들이 넘쳐나는 놀라운 시대에 접어들었다. “현재 캐나다의 피아노 슈퍼스타는 여덟 살이다.” 올해 초 캐나다 국영방송 CBC가 보도한 내용이다. 그 슈퍼스타는 케빈 첸으로 이미 캐나다의 피아노 강사 자격시험에 합격했으며 현재 토론토의 로열 콘서버토리 음악학교에 재학 중이다.

캐나다의 또 다른 어린이 피아니스트 라이언 왕(6세)은 2013년 카네기홀에서 공연했다. 한편 10세의 피아니스트 라에티티아 한은 지난 3년여 동안 쇼팽과 베토벤 연주로 독일 음악애호가들에게 즐거움을 안겨줬다. 영국의 앨마 도이처(9세)는 두 살 때 피아노를, 세 살 때 바이올린을 시작했고 지금은 오페라를 작곡한다. 도이처는 노키아의 벨소리를 작곡하면서 작곡의 묘미를 알게 됐다. 유럽과 북미의 음악학교들은 각종 오디션에서 예전에 25세 정도의 참가자에게 적합하다고 여겨지던 곡들을 완벽하게 연주하는 10대 초반 연주자들이 점점 늘어난다고 말한다.

이런 경향은 피아노에서 가장 두드러지며 현악 부문 역시 과거 어느 때보다 어린 나이에 놀라운 기량을 보여 주는 연주자들이 늘어나는 추세다. 세계적으로 이름난 밴 클라이번 피아노 경연대회는 이런 경향을 반영해 최근 13~17세 부문을 추가하겠다고 발표했다. 아메리칸 프로테제 경연대회는 이미 6~10세 부문을 신설했다. 또 뉴욕의 코프먼 센터는 내년에 열릴 제2회 국제 청소년 피아노 경연대회의 참가 범위를 7~17세로 확정했다.

어린 명연주자 대다수가 위안판처럼 중국인이거나 중국 혈통을 지녔다. “요즘 경연대회에서 우승하는 어린 연주자 대다수가 아시아인이다.” 영국 맨체스터의 체텀 음악학교에 몸담고 있는 위안판의 스승 머리 맥라클란(그 자신도 유명한 연주자다)이 말했다. “아시아인들은 음악학교와 콘서버토리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중국에는 어린 피아니스트 3000만 명이 있다고 알려졌다. 그러니 경연대회에서 우승하는 중국인이 많은 건 놀랄 일이 아닌지도 모른다. 하지만 맥라클란은 중국인 어린이들이 피아노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이유는 그들의 가족이 피아노 연주에 수반되는 근로정신에 가치를 두기때문이라고 말했다. 유럽과 미국의 음악학교나 콘서버토리에서 공부하는 중국인 신동들이 갈수록 늘어난다. 물론 신동은 옛날에도 있었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여섯 살 때 건반 악기와 바이올린의 뛰어난 연주 실력으로 18세기 공작들과 군주들을 황홀하게 했다. 게다가 당시 그는 이미 작곡도 여러 곡 완성했다.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난 피아니스트 다니엘 바렌보임은 여덟 살 때 비엔나에서 공연했고, 독일 바이올리니스트 안네-조피 무터는 열세 살 때 국제 무대에 데뷔했다. 하지만 그들은 뛰어난 기량과 촉망되는 예술성을 겸비한 진짜 신동이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오늘날은 어린 나이 자체로 가치를 평가 받는 어린이 스타들이 너무 많은 듯하다.

만약 케빈이나 앨마가 열다섯 살, 아니 열 살이었다고 해도 CBC 방송과 ‘엘렌 드제네레스 쇼’에 출연해 연주했을까? “지금 같은 상황에선 어떤 곡이든 원하는 속도로 연주할 수 있는 기계 같은 연주자를 만들어낼 위험이 있다.” 베네수엘라의 저명한 피아니스트 겸 즉흥연주자인 가브리엘라 몬테로가 말했다. (몬테로 역시 어린 시절 신동으로 불렸다.)

일각에서는 어린 나이를 앞세운 경쟁이 하향 경주가 됐다고 여긴다. “연주 내용이나 예술성보다 어린 나이의 성취를 강조하는 추세라 걱정스럽다”고 카플린스키가 말했다. “16세의 연주자가 아직 카네기홀에서 연주해보지 못했다며 한탄하는 걸 봤다.” 하지만 나이를 기준으로 한 경쟁이 왜 관심을 모으는지 이해할 만하다. 예술성보다는 나이를 측정하기가 훨씬 더 쉬운 데다 연주자의 어린 나이를 내세우면 언론에서도 더 눈길을 끌 수 있다.

유명한 기획자 한 명이 최근 중국을 방문했을 때 유럽 무대 진출을 꿈꾸는 어린 명연주자들의 연주를 들었다. 그 중에 9세 어린이가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10세나 11세 연주자는 낙오자처럼 보인다. 1996년 영화 ‘샤인’에서 제프리 러시는 10대 때 성공에 대한 압박감을 이기지 못해 신경쇠약증에 걸린 영국 피아니스트 데이비드 헬프갓을 연기했다. 헬프갓의 이야기는 물론 극단적인 사례지만 신동들이 꼭 성인 음악가로서 대성하란 법은 없다. 사실 어린 시절의 성공은 음악가의 향후 진로에 거의 영향을 주지 않는다.

“어린 나이의 성취는 장기적으로 봤을 때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카플린스키가 말했다. “어린이 연주자들은 관객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한다. 그렇게 어린 누군가가 까다로운 연주를 해내는 걸 보는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 중 일부는 얼마 안 가서 지쳐 나가떨어진다.” 카네기홀이나 런던 사우스뱅크 센터에서 아직 연주해 보지 못한 16세 연주자들에겐 위로가 될지 모른다.

이미 여러 피아노 경연대회에서 우승한 위안판은 신동에서 인정받는 음악가로 도약하는 데 성공했다. “기술을 올바른 시각에서 봐야 한다”고 위안판은 말했다. “기술은 예술적 목표를 성취하는 데 도움이 되는 방편일 뿐이다.” 하지만 예술적 목표 없이 단지 부모나 스승, 청중에게 칭찬을 들으려고 기술을 연마한 어린 연주자들은 나중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 어린이 스타들이 평범한 10대 연주자가 되면 자신을 혹독하게 훈련시킨 부모를 원망하면서 괴로워한다.

케빈과 라이언, 라에티티아, 앨마 같은 신동들의 진정한 재능은 그들이 20년 후에도 연주로 청중을 사로잡을 수 있는가에서 판가름난다. 모차르트의 업적은 전설이 됐고, 바렌보임(현재 지휘자로도 활동한다)과 무터는 음악계의 거인으로 통한다.

“음악 신동에서 예술성을 인정받는 성인 음악가로 거듭나기는 매우 어렵다”고 몬테로가 말했다. 몬테로는 여덟 살에 콘서트 무대에 데뷔했지만 10년 후 피아노 연주를 포기했다. “예술성이 있는 연주자는 (연주를 통해 청중에게) 해줄 말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일년 내내 연습실에만 틀어박혀 지내면 할 말이 뭐가 있겠는가?” 몬테로는 인생 경험을 쌓고 자신만의 예술적인 목소리를 찾아낸 뒤 20세에 다시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런던 외곽에 있는 명문 기숙학교 크라이스츠 호스피털은 최근 음악 부문에서 콘서버토리 수준의 레퍼토리를 연주하는 13세 응시생이 눈에 띄게 늘었다. 이 학교의 음악 감독 앤드류 클리어리는 수준 높은 연주자들은 그보다 못한 다른 연주자들에게 자극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특정 곡을 연주할 수 있다고 해서 좋은 합주자가 되는 건 아니며 함께 연주하지 못한다면 음악에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그는 덧붙였다.

카플린스키는 콘서버토리들이 어린 연주자를 지원할 때 예술적 잠재력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고 말한다. “오디션에 참가해 악보대로 정확히 연주하는 어린이 연주자들이 많다. 하지만 그들의 연주 뒤에서 음악적 공백이 느껴지는 경우에는 입학을 허락하지 않는다.” 또한 줄리아드는 기량이 뛰어나지 않더라도 예술적 잠재력이 느껴지는 어린 연주자들에게 입학을 허락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요즘은 아홉 살짜리 명연주자가 워낙 많다 보니 미래의 신동들이 ‘엘렌 드제네레스 쇼’에 출연하기는 더 힘들어 질 듯하다. 몬테로는 개인적 해석이 결여된 음악 공연을 단순한 “숫자 놀음”이라고 말한다. 연주 속도가 빠를수록, 연주자의 나이가 어릴수록 주목받기 때문이다. 많은 음악가들이 그의 생각에 동의한다. 맥라클란은 “연주자는 열심히 연습해야 하며 나이가 어릴 수록 좋은 건 사실이다”고 말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음악과 사랑에 빠져야 한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신동들에 밀려 자신이 낙오자라고 느끼는 14세 연주자들에게도 아직 희망이 있다는 말이다.

ELISABETH BRAW NEWSWEEK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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