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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콥스키 음악, 춘향 위해 쓴 것 같아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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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3호 08면

지젤, 오데트, 오로라, 클라라, 키트리, 줄리엣, 타티아나... 검은 머리, 까만 눈동자를 가진 우리 발레리나들은 무대에 오르는 순간 외국인이 된다. 하지만 러시아나 프랑스에서만 아름다운 아가씨가 멋진 청년과 동화 같은 사랑을 꿈꾸는 건 아니다. 클래식 발레의 공통 소재인 선남선녀 러브스토리는 한국에도 많다.

유니버설발레단 창작발레 ‘춘향’ 두 주역 김주원·황혜민

유니버설발레단의 창작발레 ‘발레 춘향’(9월 27~28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이 5년 만에 돌아온다. 국립무용단의 한국 무용 ‘춤, 춘향’을 모티브로 2007년 초연한 작품을 이번에 음악부터 안무, 무대, 의상까지 싹 갈아엎었다. 1984년 창립과 동시에 해외 투어에 나서며 ‘발레 한류’를 선도해 온 유니버설발레단이 창작발레 1호 ‘심청’(1986)에 이어 ‘세계 시장에 내놓을 만한 우리 작품’으로 개발한 야심작이다.

동서고금이 공감하는 러브 스토리에 발레 작곡의 대명사 차이콥스키의 음악을 차용해 보다 보편적인 드라마 발레로 완성했고, 이미 내년 4월 오만 로열오페라하우스 초청이 확정된 상태다. ‘발끝으로 선 춘향’은 과연 한국 발레에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할 수 있을까. 김주원(37)과 황혜민(36). 지난 10여 년간 각각 국립발레단과 유니버설발레단이라는 대한민국 양대 발레단의 ‘얼굴’로 활약해 온 두 발레리나도 ‘춘향’을 앞두고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춘향-몽룡 커플로 춤추는 김주원과 콘스탄틴 노보셀로프.

“혜민아, 나 이쪽 얼굴이 더 예쁘지 않니?”(재빨리 자리를 맞바꾸며) “제가 선배니까요.(웃음)”

건드리면 부러질 듯한 유리 인형처럼 새초롬한 김주원의 이미지가 깨진 순간이다. 스스로 “남자 후배들이 ‘형’이라 부른다”는 그에게서는 시원시원하고 털털한 중성적 매력까지 느껴졌다. 김주원의 표현을 빌면 황혜민은 ‘딱 열여섯 춘향’. 20년 동안 나이를 먹지 않은 듯 수줍고 앳된 소녀 발레리나 그 자체였다.

선화예중 시절 ‘선후배 편지교환’ 짝궁으로 처음 만났다는 두 사람. 오랜 세월 양대 발레단을 대표한 얼굴로서 은근한 경쟁심과 긴장감을 기대했지만, 이들에겐 경쟁심이 아닌 공감대가 있었다. ‘발레계 대표 절친’으로 자주 만나 “거의 모든 얘기를 나눈다”는 이들은 “둘이 같이 인터뷰하는 건 처음이라 너무 재미있다”며 유쾌한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15년간 수석무용수로 몸담았던 국립발레단을 2년 전 나온 김주원은 그간 다양한 개인활동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간을 보냈지만 그만큼 외로움도 컸단다. 지난 7월 ‘지젤’로 유니버설의 상임객원 수석무용수로 처음 합류한 그는 ‘춘향’에 대해 “어떤 무용수도 마다할 리 없는 좋은 기회”라며 “좋은 작품에 집중하려고 자유를 택한 건데 큰 작품 기회가 주어져 정말 감사하다”고 했다. 그와 파트너를 이루는 몽룡은 러시아인 콘스탄틴 노보셀로프. 몇 달 전 제 3의 춘향 강미선과 함께 황혜민-엄재용 커플에 이은 두 번째 유니버설 수석무용수 커플로 탄생한 새신랑이다.

15년간 국립발레단에 있다 유니버설에 오니 어떤가요.
김주원(이하 김): 모든 발레단 시스템이 오전 11시부터 오후 6시까지 똑같이 움직여요. 사람들이 다르지만 좋은 자극이 되고, 새로운 것 배울 수 있어서 좋아요. ‘지젤’ 때 걱정도 했는데 막상 참 편하게 춤췄어요. 파트너는 물론 혜민이와 재용이도 옆에서 도와주고 단장님도 그랬고….

황혜민(이하 황): 언니가 오니 너무 좋아요. 언니는 국립에서 15년간 정점에 있었던 최고 무용수인데, 같은 작품 같은 역할을 할 기회가 어디 있겠어요. 언니 보면서 배우는 점도 많아요. 그 연륜이나 노련미는 애들이 따라갈 수 없거든요. 발레단에서 여자무용수 중 제가 제일 선배라 대화 상대가 남편밖에 없는데 언니가 와서 바깥세상 얘기도 하고 너무 좋네요. 이 작업이 뜻 깊은 것 같아요.

푸른 눈의 몽룡은 어떤가요.
김: 아주 매력있는 무용수죠, 호흡도 잘 맞고. 몽룡이가 되게 아름다워요. 그만큼 한국 발레도 글로벌해졌구나 싶고요. 외국에서 들여온 클래식 속에서 동양인의 모습으로 그들의 춤을 따라해 왔는데, 이제 역으로 우리 색 가진 발레 만들어내고, 외국인 무용수가 주역을 한다면 그만큼 발전한 것이죠. ‘아, 한국발레가 이렇게 글로벌화 되고 있구나’ 싶어 새롭고 재밌어요. 캐릭터도 잘 소화해요. 붓글씨 쓰는 거나, 헤어짐의 아픔을 표현하는 게 놀랍더군요. 물론 부부를 갈라놓게 됐으니 미안하죠. 처음 콘스탄틴 손잡았을 때 ‘미선에게 미안하다고 전해달라’고 얘기했어요.(웃음)

황혜민은 이번에도 남편 엄재용과 짝을 이룬다.

혜민씨는 늘 남편과 커플로 무대에 서는데 다른 파트너도 필요하지 않나요.
황: 24시간 같이 있는 날도 있다 보니 그런 생각도 해요. 그런데 재용에게 너무 익숙해서 막상 바꾸면 불편하더라고요. 익숙한 게 장점이자 단점인 것 같아요. ‘춘향’도 몽룡과의 2인무가 1, 2막 하이라이트거든요. 재용과 많이 맞춰봤으니 거기서 노련미 있게 더 잘해 보려고요.

김: 재용과 혜민은 둘이 하나같아요. 따로 보는 것보다 둘이 함께하는 걸 보는 게 맞는 것 같아요. 가끔 연습 때 재용에게 받쳐달라 해보면 너무 잘 받아주는 좋은 파트너거든요. 둘 다 배려하고 자기 몸 컨트롤도 잘하는 게 한 색깔이라, 다른 파트너가 들어가면 왠지 그 에너지에 못 미치고 반쪽인 느낌이에요. 그래서 둘이 추는 게 맞아요. 제가 재용이와 추는 것도 꿈꿔 봤으나 이건 아니구나, 미선에게 욕먹는 게 낫겠다 한 거죠.(웃음)

작품이 싹 바뀌었다던데, 구버전과 어떻게 다른가요.
황: 음악이 완전 바뀌어서 새로 하는 기분이에요. 예전 음악에 익숙해서 처음엔 적응이 어려웠는데, 들을수록 좋은 게 역시 차이콥스키더라고요. ‘차이콥스키가 이런 음악도 했나’할 정도의 음악들을 모은 거라 전혀 새로우실 거에요.

김: 차이콥스키에 동양적 선율이 있더라고요. 춘향을 위해 작곡한 건가 싶을 정도로요. 그렇다고 춤까지 한국적인 건 아니고, 초연보다 글로벌화시킨 것 같아요. 외국 무용수도 춤출 수 있게 동작도 훨씬 모던해지고 스토리 전개도 빨라요. 의상도 간소하고 세트도 미니멀해져서, 서양인들이 볼 때 동양 색채가 진하면서도 모던한 느낌 받을 것 같아요.

창작발레와 서양 클래식 발레를 대하는 느낌이 다르겠죠.
김: 클래식을 좋아하니까 지금껏 발레를 하고 있어요. 그런데 나이 들수록 감정적 표현에 훨씬 깊이가 생기고 춤이 자유로워지면서 창작발레에 끌려요. 제 개성을 십분 녹여낼 수 있고 감성의 스펙트럼이 좀 더 큰 것 같고. 정형화된 틀이 없어서 창작 과정은 고생스럽지만 무용수로서 더 매력 있는 것 같아요.

황: 만날 공주역 맡고 왕관 쓰고 튀튀 입고 정해진 틀에만 있다가, 조금 더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할 수 있어서 ‘심청’이나 ‘춘향’은 특별해요. 하지만 제일 좋아하는 건 ‘지젤’ ‘오네긴’ 같은 서정적인 작품이죠.

김: 저도 비극이 좋아요. 죽는 게 좋고, 사랑도 슬픈 게 좋아요. 더 깊이 파고들고 더 많이 캐릭터에 녹아들어야 해서 그런 것 같아요. 배우들이 그런 연기하고 카타르시스 느끼잖아요. 유니버설 레퍼토리인 ‘오네긴’도 오랫동안 침 흘려 왔고, 꼭 해보고 싶어요.

무용수도 각자 스타일이 있는데, 서로는 어떤 무용수인가요.
황: 언니는 서정적인 춘향, 심청도 어울리지만 키트리처럼 센 캐릭터도 다 어울리는 만능이에요. 저는 한계가 있거든요. 서정적인 게 잘 맞고 강한 역은 좀 부담스러워요.

김: 얘, 그렇게 밖에 말 못하니(웃음). 모든 무용수가 부러워하는 게 순백색이에요. 혜민이가 말은 이렇게 하고 또 항상 조용하고 한결같은 느낌이지만, 춤출 때는 폭발력이 엄청나요. 한지처럼 안무가가 원하고 캐릭터가 요구하는 모든 색깔을 다 흡수해서 표현하는 타고난 발레리나죠. 질투 날 때도 있어요. ‘춘향’ 포스터 보셨나요? 얘 발이 세계적인 라인이에요. 저는 그 발이 갖고 싶어 되게 많이 노력했는데, 혜민이는 그걸 타고 났더라고요.

황: 저는 그렇게 갖고 태어났지만 언니는 그렇지 않은데 정말 노력해서 만든 발이라 더 값진 것 같아요. 그 노력이 더 대단한 거죠.

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니(웃음). 여기 와서 놀란 거는 혜민이가 제일 열심히 한다는 거에요. 제일 노장인데 누구보다 많이 연습하니까…. 조건도 좋은데 노력까지 하니 얄밉죠.

요즘 춤이 다양하고 자유로워지는데, 발레는 틀에 갇힌 느낌도 들어요.
김: 발레는 틀 안에서 자유로움 갖고 개성 표출하고 감정을 담아 관객에게 눈물 흘리게끔 하는 거죠. 두 가지를 다 가진 선택받은 사람들만이 하는 것이 발레에요. 형식도 자유도 모두 표현해야 하니까요.

‘춘향’의 명장면을 꼽는다면.
황: 1막 첫날밤이요. 몽룡이 춘향 옷을 한 겹씩 벗기면서 2인무가 시작되거든요. 그 부분이 너무 아름다워요.

그 장면이 너무 길지 않나요.
김: 이번에 많이 짧아졌어요. 현실적으로 그렇게 오래 걸릴 수 없어서 그런지. 아, 19금 발언인가요(웃음). 주인공들 춤은 당연히 아름답지만 기생들 춤이 재미있어요. 작품을 풍성하게 해주는 ‘디베르티스망’(줄거리와 무관한 구경거리)에 해당하는 변사또와 기생들 춤이 정말 재치있어서 춘향이 발레로도 아주 좋은 소재란 걸 느꼈어요. 해외에서도 충분히 사랑받을 만한 작품이에요.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전호성 객원기자, 유니버설발레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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