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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습에 저항한 시대의 두 반항아 여자 탓에 지옥의 삶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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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3호 14면

뭉크의 ‘절규’(1893·왼쪽)와 ‘지옥에서의 자화상’(1903).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10월 12일까지 ‘뭉크전’이 열리고 있다.

1893년 에드바르드 뭉크(1863~1944)는 미술사를 넘어 인류 문화사에 길이 남을 아이콘 하나를 완성했다. 작품 ‘절규’다. 영화 ‘스크림’의 유령 얼굴, ‘나 홀로 집에’ 포스터에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꼬마 매컬리 컬킨의 자세는 그 대중적 번안물이다. 발표 당시 낯설고 거친 형식으로 비판받은 이 작품은 이제 세대를 넘어 사랑을 받는다.

이진숙의 접속! 미술과 문학 <1> 뭉크의 그림 vs 스트린드베리의 소설 『지옥』

‘절규’의 매력은 이 폭넓음에 있다. 뭉크는 ‘절규’의 습작들을 그리면서 ‘절망’ ‘불안’ 같은 직접적인 감정을 제목으로 삼았다. 최종 작품의 제목을 ‘~으로 인한 절규’에서 원인 부분은 공란으로 남겨두고 그냥 ‘절규’라고만 한 것은 신의 한 수였다.

뭉크, 노을 통해 죽음을 미학적으로 수용
누구나 이 그림 앞에서 자기 상황을 대입해 소리지를 수 있다. 단언컨대 22세기에도 사람들은 ‘절규’할 것이다. 그가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은 ‘절규’라는 애티튜드다. ‘절규’라는 행위를 그림으로 만든 것 자체가 뭉크의 놀라운 창안이다.

뭉크는 그림을 그린 동기를 상세한 기록으로 남겼다. 그는 어느 날 친구 둘과 산책을 나갔다. 노을이 지기 시작했다. “검푸른 피오르드와 이 도시를 덮은 하늘은 마치 피 같았고 불의 날름거리는 혀 같았다.” 그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마치 강력하고 무한한 절규가 대자연을 가로 질러 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황혼의 노을에서 그는 대자연의 법칙인 ‘죽음’을 보았던 것이다.

장대하게 지는 해를 바라보는 것은 인류의 첫 번째 타나톨로지(thanatologie·죽음학)였다. 원시인들은 저녁에 태양이 죽었다가 아침에 다시 태어난다고 생각했다. 지는 해가 뿌리는 노을의 아름다움을 통해 인류는 어둠으로 귀결되는 죽음의 세계를 미학적으로 수용하게 됐다.

‘절규’에서 다른 두 친구와 달리 민머리 인물은 해골 같기도, 갓 태어난 태아의 얼굴 같기도 하다.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하루하루 죽어가는 것일 뿐이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죽음 앞에서 고통스러운 절규가 터져나왔다. 어린 시절 어머니와 누이를 잃었고 스스로도 몹시 병약했던 뭉크는 죽음을 옆구리에 끼고 살았다. 그는 정신적 고통과 육체적 질병을 동력 삼아 예술의 바다를 항해했다. 죽음에 대한 공포, 죽음에의 충동, 신경쇠약, 불행에 대한 탐닉은 뭉크만의 증세가 아니었다. 19세기 말 시대의 질병이었다.

스트린드베리의 지옥 빛깔은 장밋빛
극작가로서 현대극의 기초를 놓았다고 평가받으며, 화학자로도 이름을 알린 스웨덴 출신의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1849~1912)도 이 그림에 격하게 공감했다. 1896년 그는 ‘절규’를 “분노로 붉어진 자연, 신과 같아질 수 없으면서도 신이 되고자 망상하는 어리석은 미물들에게 뇌우와 천둥으로 말하기 시작한 자연 앞에서의 경악의 비명”이라고 말했다. 뭉크를 통해서 그는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다.

스트린드베리는 젊은 시절부터 고향을 떠나 유럽을 떠돌아다녔다. 그는 자전적 소설 『지옥』(1898)에서 파리에서 뭉크를 만났던 장면을 회상한다. 둘은 여러 면에서 뜻이 잘 통했다. 너무 예민해서 타인과의 교류가 원만하지 못한 점조차 닮았다. 둘은 후에 한스 예거, 헨리크 입센 같은 예술가들과 함께 교류했다. 낡은 것에 저항하며 “위험하게 살라(Gefährlich Leben)!”는 니체의 말이 예술가들 귀에 쩌렁쩌렁 울리던 시절이었다. 이들은 낡은 관습에 저항하는 시대의 반항아들이었다. 대중의 몰이해와 그에 따른 고독과 궁핍을 피할 수 없는 숙명처럼 여겼다.

이 무렵 스트린드베리는 신경쇠약·편집증·협심증이라는 의사의 진단과 함께 심각한 정신적 위기를 겪었다. 소위 ‘지옥(Inferno)’ 시대였다. 이때의 경험이 자전적 소설 『지옥』을 탄생시켰다. 단테의 『신곡』은 지옥-연옥-천국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스트린드베리에게는 오직 ‘지옥’만 있었다. 단테의 지옥은 저승에 있었으나 스트린드베리의 지옥은 이곳, 이승에 있었다.

뭉크의 절규가 아름다운 노을을 배경으로 한 것처럼 스트린드베리의 지옥은 장밋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누구에게는 ‘장밋빛 인생’이 행복을 의미했지만, 그에게는 아니었다. 스트린드베리는 가는 곳마다 장밋빛을 본다. 이혼 뒤 딸을 만나러 가서 그가 머문 방도 장밋빛 방이다. 그에게 큰 영감을 준 스웨덴 철학자 스웨덴보리가 묘사한 지옥은 분명 ‘장밋빛’으로 시작됐다. 지옥은 아름답고 매혹적인 삶에서 “기쁨이 하나씩 연기처럼” 사라져 결국, “자신이 배설물로 가득한 초라한 누옥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서 시작된다.

“고통 즐기라는 초라한 농담이 인생인가”
스트린드베리와 뭉크의 삶을 지옥으로 만든 결정적인 것은 여자들이었다. 스트린드베리의 아버지는 지체 높은 가문 출신이었고, 어머니는 하녀였다. ‘하녀의 아들’(그의 자서전 제목이다)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부터 신을 찾아 헤매었으나 악마 밖에 발견할 수 없었”던 불행한 인간이었다. 그는 세 번 결혼했지만 모두 실패로 끝났다. 만악(萬惡)의 근원인 “여자를 멀리하고자 하면 밤마다 불건전한 꿈들”이 그를 찾아와 괴롭혔다. 피할 수 없는 것을 혐오하고, 혐오하는 것을 피할 수 없으니 세상은 다만 지옥일 뿐이었다.

여자들로 인해 받은 상처라면 뭉크도 할 말이 많다. ‘지옥에서의 자화상’(1903)은 뭉크와 연인 툴라 라르손 사이에 있었던 총기사건 이후에 그려졌다. 연인이 사랑한다며 총으로 목숨을 위협한 사건으로 그의 인생은 “지옥처럼 변했다”. 유황 불길에 휩싸인 지옥에서 아무 보호 장구도 갖추지 못하고 알몸으로 서있는 가련한 뭉크. 긴 죽음의 그림자만이 그의 뒤를 지켜줄 뿐이다.

단테가 『신곡』에서 묘사한 지옥은 나폴리 남부를 연상시키고, 스웨덴 철학자 스웨덴보리가 지옥으로 묘사해놓은 곳은 당시 스트린드베리가 머물고 있던 오스트리아 남부 지방을 닮았다. 비단 이 사람들에게만 그럴까? 한국 사람들의 지옥은 분명 한국을 닮았을 텐데. 이 피할 수 없는 지상의 지옥에서 결국 할 수 있는 일은 “고통을 즐기는 것”일 뿐. 책 말미에 스트린드베리는 깊고 깊은 한숨을 내쉰다. “이런 농담이, 이런 초라한 농담이 인생이란 말인가!”

이런 농담 같은 인생을 뭉크는 끝까지 견뎌냈다. 그는 자발적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해서 치료를 받았고, 81살까지 살아냈다. 고향으로 돌아온 뭉크는 고흐처럼 자연 속에서 생명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나는 갑작스럽게 혹은 의식하지도 못한 채 죽고 싶지 않아. 나는 이 마지막을 경험하고 싶어.” 죽음을 암시하는 사물들과 함께 한 여러 점의 자화상들은 그가 죽음을 삶의 일부로 덤덤하게 받아들였음을 보여준다.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 죽음과 화해하기, 아무런 환상 없이 지옥을 지옥으로 체험하기. 이것이 뭉크의 삶이었다.

이진숙 문학과 미술을 종횡무진 가로지르며 각 시대의 문화사 속 인간을 탐구하는 데 관심이 있다. 『위대한 미술책』『미술의 빅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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