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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나의 동경 나의 위안] 98세 때 친 ‘프랑스 모음곡’ 미적 쾌감 넘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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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3호 27면

호르초브스키는 가장 긴 연주경력을 보유한 피아니스트로 꼽힌다. 98세인 1990년 모습. [위키피디어]

폴란드계 미국 피아니스트 미에치슬라브 호르초브스키(1892~1993)는 여러 면에서 우리를 놀라게 한다. 그는 99세에 거주지 필라델피아에서 마지막 연주무대를 가졌으며 같은 해 일본 초청 연주회에도 참여했다. 그가 90세 후반에 라이브 무대에서 모차르트·베토벤·바흐·쇼팽 등의 곡을 연주한 기록은 열 손가락으로 셀 수 없을만큼 많다.

피아니스트 호르초브스키

그 연주들이 다만 장수무대의 기록으로 그친 게 아니고 하나같이 감동적인 명연주였다는 점이 더욱 놀랍다. 99세에 일본에서 연주한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두 곡을 들었는데 연주자의 나이 같은 것은 잊어버리고 경쾌하고 멋진 모차르트 연주에 흠뻑 젖고 말았다. 어릴 때 신동으로 불렸던 그는 9세에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으로 처음 무대에 섰고 이후 유럽 각지로 연주 여행을 다녔다. 이것은 같은 나이 때의 모차르트를 연상케한다. 놀라운 점은 더 있다.

89세에 이탈리아 피아니스트 비체 코스타와 결혼했는데, 설마 초혼은 아니겠지만(초혼인지 재혼인지 명확하지 않다), 보통 사람 사이에 흔히 있는 일은 아니다. 결혼 십주년에 기자가 결혼생활이 어땠냐고 물었을 때 아내는 즐거운 웃음과 함께 아주 행복했노라고 서슴없이 대답했다. 인간과 음악에 대한 무한한 신뢰감이 둘의 사랑을 키웠을 것이다. 비체 코스타는 남편 사후 각종 기록과 남편이 은밀히 작곡한 몇 개의 노래들을 정리해서 세상에 내놓았다. 호르초브스키는 연주 외에도 가르치는 일에 열성이었는데 숨을 거두기 일주일 전에도 레슨을 했다고 한다. 그에게 배운 제자 가운데는 머레이 페라이어와 피터 제르킨 같은 걸출한 연주가들이 있다. 그러고 보니 부드럽고 우아한 연주를 자랑하는 페라이어가 스승의 영향을 받았다는 느낌도 든다.

이제 마지막 놀라움을 말할 차례인데, 그가 98세에 라이브 무대에서 연주한 바흐의 ‘프랑스 모음곡’ 연주(사진)가 그것이다. 사실 이 연주에서 받은 감동과 기쁨이 이 글의 발단이 되었다. 호르초브스키의 대표 음반들은 베토벤·모차르트·쇼팽·포레·바흐 등에 걸쳐있다. 그러나 ‘프랑스 모음곡’은 크게 부각되지는 않았다. 바흐의 건반 작품 중 명성에서는 ‘골드베르크 변주곡’에 뒤지고 스케일에서도 ‘영국 모음곡’에 뒤져 그다지 자주 연주되는 편은 아니다. 그러나 삶이 따분하고 무료하다 느낄 때 바흐 곡 가운데 딱 한곡을 고르라면 나는 ‘프랑스 모음곡’을 꼽을 것이다. 음악에서 느끼는 ‘심미적 감흥’ 혹은 ‘미적 쾌감’이란 말이 허용된다면 바흐의 세속음악 가운데 그 점에서 이 곡이 으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지금은 작고했지만 친히 지내던 동료작가가 오래 전 “딱 한 곡을 추천해달라”고 청했을 때 나는 두말 없이 ‘프랑스 모음곡’을 추천했다.

스위스 신학자 칼 바르트는 모차르트 음악이 기적의 산물이란 언급을 자주 했는데 나는 바흐의 이 곡을 들을 때마다 그 언급은 바흐 음악에 더욱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곤 한다. 프랑스 오페라의 무용음악에서 형식을 빌려온 이 곡은 구조가 간결하지만 그 안에는 오묘하고 세련미 넘치는 다채로운 악상들이 자유롭게 숨쉬고 있다. 바흐가 가장 행복했다는 괴텐시절(1722년) 작품으로 이때 바흐는 자기의 영감을 이 작품 속에 마음껏 투영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이 곡 연주에서 그동안 글랜 굴드의 연주가 가장 마음을 끌었다. 페달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 듯한 굴드의 연주는 추상성이 강한 알르망드나 쿠랑트, 지그 같은 데서 다이아몬드 같은 단단하고 날카로운 소리로 매력을 발산한다. 한동안 바흐 연주 전범으로 알려진 러시아의 타티아나 니콜라에바 연주는 친절하고 자상해서 디테일을 충실하게 살리고 있으나 너무 평이해서 지루한 느낌을 주고, 슈베르트 연주에서 뛰어난 기량을 보여주던 안드라스 쉬프는 어딘지 드라이브 걸린 숙련공의 단조로운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일본이 자랑하는 피아니스트 미치코 우치다가 6번 사라방드에서 잠시 들려준 연주는 세밀화 같은 정성이 깃든 연주에서 간절한 염원이 느껴져 특이한 감흥을 주었다. 다양한 연주들이 있으나 한시절 너무 자주 듣다 보니 이 곡에 물린 상태가 되었다. 수년 동안 잊어버린 그 감흥을 98세 호르초브스키 연주가 일거에 되살려주었다.

그의 연주는 과시나 의욕으로 빚어지는 인위적 힘이나 멋이 전혀 가미되지 않은, 순진한 소년의 연주처럼 들린다. 그러나 소리는 연잎 위에 구르는 물방울처럼 하나하나 영롱하게 반짝이고 연못의 파문처럼 잔잔하게 가슴에 젖어온다. 듣는 이는 이것이 가공미가 제거된 가장 세련된 연주라는 것을 느낄 것이다. 98세에 이처럼 신선하고 빈틈없는 연주를 들려줄 수 있는가? 어느 댓글을 보니 그는 여전히 아직 젊은 연주가라는 표현과 천사의 음악이란 표현이 눈길을 끌었다. 이 연주에 아주 적절한 평가라고 느꼈다.

흐르초브스키는 신장이 5피트이고 손도 매우 작아서 초기에는 난이도 높은 곡을 피했고 화려한 연주기교를 자랑하는 호로비츠나 루빈슈타인 같은 수퍼스타와 자신을 비교하는 걸 달가와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는 무려 90년 동안 연주생활을 지속했으나 늘 조용하고 소문 없는 삶을 살았다. 유명한 백악관 초청음악회에도 카잘스와 함께 참여했으나 연주회 소식에는 카잘스 얼굴만 크게 부각되었다. 그러나 98세에도 젊은이 못지 않게 신선하고 순도 높은 음악성으로 모차르트와 바흐를 들려준 호르초브스키야말로 진짜 수퍼스타가 아닐까.

송영 작가 sy4003@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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