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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 노인 자살, 뒷짐 진 정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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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임미진 탐사기획팀 기자

우리나라 노인 자살률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0개국 가운데 1위라는 통계는 취재팀에도 충격적이었다. 혼자 사는 노인(독거노인)들이 일반 노인들보다 스스로 세상을 등지는 일이 세 배나 많다는 분석도 부모와 별거 중인 자녀들에게 경종을 울렸다. 그만큼 한국의 노인들은 자녀와 사회, 그리고 국가로부터 소외당하고 있었다.

달동네의 한 할아버지는 "이가 없어서 낡은 녹즙기에 밥과 김치를 섞어서 갈아 마신다"고 하소연했다. 가난한 독거 노인들은 한결같이 "사는 것이 지옥이다. 빨리 죽고 싶다"고 토로했다. 그렇다고 이들의 고통을 자녀들의 불효 탓으로만 돌릴 수 있을까. 본지 보도가 나가자 서울에서 학원을 운영한다는 40대 독자는 전화를 걸어와 "자식들도 할 말 있다"고 했다.

"지난해 어머니는 허리 디스크로, 아버지는 뇌경색으로 장기간 입원하셨다. 지금은 전문 요양병원에 모시고 있는데, 한 달에 300만원이 든다. 설상가상으로 올해 초 장인이 중풍을 맞으셨다. 돈도 돈이지만 몸도 마음도 너무 지친다."

극심한 외환위기를 거치고, 핵가족화가 가속화하면서 노인들도 자식들도 모두 지쳐 있다. 결국 고령화 사회를 맞아 정부가 사회 안전망을 구축할 때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정부는 노인 자살 실태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연령별.성별 자살자 수 등 기초 자료만 보유하고 있을 뿐이다. 때문에 취재팀은 별도로 서울시내 31개 경찰서에 정보 공개를 청구해 자살 원인.독거 유무 등을 분석해야 했다. 취재팀이 세계보건기구(WHO)와 외국 정부 홈페이지를 뒤져 노인 자살률을 국제적으로 비교해 보도하자 한 정부 관계자는 전화를 걸어와 "자료를 어떻게 구했느냐"고 되묻기도 했다. 일본의 경우 매년 유서 등을 통해 자살 원인을 통계 낸다. 또 직업별, 배우자 유무별, 가족 형태 등으로 종합 분석한 뒤 책 한 권 분량으로 만들어 일반에 공개한다. 일본의 노인 자살률은 우리나라의 절반 이하에 불과하다.

물론 정부는 노인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각종 대책을 내놓고 있다. 하지만 실태 파악이 제대로 안 돼 있는 상황에서 믿을 만한 대책이 나올 리 없다.

임미진 탐사기획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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