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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양재학교 입학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1961년 벽두의 재키 선풍을 깃점으로 우리나라 여성들이 세계와 패션의 호흡을 같이하기 시작할 무렵 나는 커다란 개인적인 용단을 내려야할 입장에 놓였다.
처녀때부터 지녀온 양재학원에 대한 오랜 숙원이 지난해의 세계여행에서 확실해진 디자이너로서의 자각에 힘입어 더이상 시일을 끌수없을 만큼 끌어 울랐기 때문이다.
학원에 대한 꿈이 처녀시절부터 비롯되었다는 이야기를 대강 짚고 넘어가자면 내가 댕기머리 여학생이던 1927년대의 원산 루씨고녀시절로 이야기를 잠시 되돌려야겠다.
부모 형제들의 포근한 사랑과 즐겁기만한 학교생활속에서 소녀다운 아름다운 꿈만 꾸던 나의 인생관에 커다란 변화가 생겼다.
졸업반이 되면서 기숙사를 나와(집이 안변이었으므로)원산시내에서 하숙을 하게 되었는데 하숙집주인 아주머니는 양가마님답게 기품이있고 인물도 출중한 중년부인이었다.
그러나 왠지 자녀가 없는데다 남편이 작은집을 두는등 외도가 심해서 얼굴에는 늘 수심이 가득했었다.
남편되는 이는 어쩌다 며칠만에 집이라고 돌아오면 미안해 하기는 커녕 죄없는 부인에게 욕믈 퍼붓거나 손을 대는등 난폭하기 짝이 없었다.
막상 박대를 당하는 부인은 이미 체념한듯 한숨과 눈물로 세월을 보내는데 당시 순수한 소녀이던 내가 오히려 더 격분을 느꼈다.
『이렇게 천대를 받으며 살바에야 차라리 이혼을 하시지 그러느냐』는 나의 주장에 부인은 한숨부터 앞세우며 다음과 같이 자신의 심정을 토론했다.
『나도 사람인데 인간이하의 대접을 받을 때마다 이집을 나가버리고 싶은 심정이 왜 없겠수. 그렇지만 막상 나가면 갈데가 있어야지? 반겨 맞아줄 친정도 없고, 밉건 곱건남편 그늘을 떠나서는 당장 먹고 살아나갈 길이 막막하다우.
이런 이야기를 듣고 나는 여자도 자기 뜻대로 일생을 살아나가려면 경제적으로 독립할수 있는 힘이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그 때까지는 막연한 생각뿐 경제력을 갖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겠다는 구체적인 의견은 없었다.
다른 학과목의 성적이 다 갑상(요즈음 A플러스)이었던데 비해유독 수예나 재봉은 기껏 갑아니면 을상이었으니 그때부터 양재에 뜻을 두었을리는 더욱 만무다.
1931년 루씨고녀를 최우등으로 졸업하자 「올리브」 교장선생께서는 장학금을 주선해줄테니 이화여전에 진학하라고 권하셨다.
그러나 나는 일본에 가서 피아노를 공부하고 싶었으므로 32년3월동경으로 건너가 국립 무사시노(무장야)음악학교사범과에 입학했다.
동경생활에 차츰 익숙해지던 2학년 어느날 나는 고향집이 화재를 당해 가산을 모두 잃었다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들었다.
이 재난이 말하자면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된 셈이다.
부모님으로부터 경제적인 뒷받침을 받을수 없게되었으니 피아니스트의 꿈을 버릴수 밖에 없었지만그렇다고 이렇다할 소득도 없이 모처럼 떠나온 동경유학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기는 싫었다.
음악학교시절 나는 옷감을 끊어다가 하숙집 근처에 있는 일본인집에 가서 자봉틀을 빌어 옷을 직접 만들어 입기도 했는데 그 주인되는 이가 늘 내 솜씨를 칭찬해주며 본격적으로 양재를 배워보라고 여러차례 권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방향을 바꿔 양재공부를 하기로 결심하고 피아노를팔아 자봉틀을 한대 샀다.
그리고 자신의 소질을 테스트해본다는 기분으로 백화점에 옷을 납품하는 집에 가서 한달동안 견습공으로 일했다.
『부지런하고 재질이 있다』는 주인의 칭찬에 용기를 얻어 오쨔느미즈(어다の수) 양재학교에 입학한 것이 1933년 3월, 디자이너 최경자의 인생이 시작된것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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