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17)제74화 한미 외교문화요람기(84)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양유찬 대사와 내가 워싱턴에서 하도 일본을 비난하고 다녔더니 정년초 「델레스」 국무장관은 양 대사를 세 차례나 불러 일본을 너무 욕하지 말라고 귄유했다.
「덜레스」의 충고에도 꺾이지 않고 우리가 계속 기세를 부리자 일본정부는 「다니」 (곡) 재미 대사를『한국 측의 비난공세를 막지 못했다』 는 이유로 경질했다는 얘기도 있었다.
그러나 한일 모두가 회담재개를 종용하는 미국의 견해를 묵살할 수 없었다. 더욱 미국은 이번 기회에 기필코 회담을 재개시키기 위해 57년5월 워싱턴주재 양국대사를 통해 청구권 문제에 관해 과거의 국무성 해석공한을 확대 부연한 이른바 US메머랜딤(미해석각서)을 양국에 전달하고 이를 각기 수락할 것을 촉구했다.
이 각서에서 미국은 『…한일간의 특별협정에는 한국의 대일 청구가 한국정부의 재한 일본재산의 인수로 말미암아 소멸 또는 충족되었다고 사료될 범위의 결정을 포함할 것이다…』 고 말해 한일회담에서 일본의 재한 재산문제도 다루어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분노는 또다시 끓어올랐다. 이 대통령은 『 「덜레스」 는 나쁜 사람이다. 한국과의 우호를 강조하면서 뒤쪽으로 일본과 내통하고 있다』 는 말을 서슴치 않았다.이 대통령의 노기와 주미대사관의 대일 비난 강도는 비례했다.
예비절충은 엎치락뒤치락하며 살얼음을 걷는 듯 했다. 그러자 미국이 결정적인 지렛대를 행사했다. 미국은 일본으로 하여금「구보다」망언과 대한 재산 청구권을 취소하도록 압력을 넣었다.
일본은 마침내 미국의 권유를 받아들였다. 그 이면에는 부산에 억류 중인 1천여 명의 일본인 어부를 구해내야겠다는 「기시」 (안 신개) 수상의 결단이 큰 작용을 한 것도 사실이었다. 일본은 미국무성에 다음과 같은 구술서를 보냈다.
『일본정부는 한국대표단이 항의해 온 1953년 10월15일자 일본수석대표 「구보다」 씨의 발언을 취소한다.
그리고 일본은 대일 평화조약 제4조의 해석에 대한 미국정부의 성명에 입각하여 1953년 3월6일 한일회담에서 일본측 대표가 주장한 대한청구권을 철회한다.』
일본이 「구보다」 망언과 재산청구권을 포기함으로써 제4차 한일회담은 이듬해인 58년4월15일 동경에서 열렸다.
한일 양측은 미국의 압력에 의해 마지못해 대좌하기는 했으나 회담은 별로 진전이 없었다. 우리측은 양 대사 대신 임병직 주 유엔대사가 수석대표를 맡았다.
회담이 지지부진하고 있던 차에 59년 들어 재일 교포 북송문제가 터짐으로써 한일관계는 전후 최악의 상태에 빠져들고 말았다.
「기시」 정부의 「후지야마」외상은 기자회견을 통해『재일 한인의 북조선송치를 위해 후생성과 일본적십자사와 연락을 취하고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일본정부안에서도 「기시」 수상이나 후나다 (선전)등 자민당 중진들은 한국을 자극하는 것이 현명치 못하다고 반대의사를 폈으나 「후지야마」외상은 북송과 한일회담은 별개의 문제라고 우겼다.
「후지야마」 외상은 만류하는 「기시」수상에게 사표를 내 맡기고 북송을 추진했다. 그러면서 그는 일적 대표를 제네바에 있는 국제적십자위원회(ICRC)에 파견해 세계여론의 지원을 얻으려 했다. 인도주의란 명분을 찾자는 것이었다.
주미대사관은 본국정부·주일대표부와 삼위일체가 되어 저지 총력전에 나섰다.
양대사와 나는 국무성은 물론 각 언론 기관을 수시로 찾아다니며 일본정부의 북송계획이 강제적인 것이며 비인도적인 처사라고 규탄하고 미국이 적극적인 저지 능력을 발휘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국내에서는 대규모 북송반대 시위가 벌어졌다. 자유당과 민주당은 오랜만에 혼연일체가 되어 초당외교에 나서 장택상· 최규남· 유진오·최규하씨로 구성된 대표단을 제네바에 파견했다.
그러나 우리의 이 같은 노력은 모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일본과 북한 적십자회는 그해 6월11일 제네바에서 북송원칙에 합의했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자 국내에서는 주일대표부에 대한 인사쇄신의 소리가 높아졌고 조정환 외무장관은 국회로부터 불신임 결의를 받아 자리에서 물러났다.
북송선의 첫 배가 떠난 것은 59년12월14일이었고 어렵게 주선된 제4차 한일회담은 흔적 없이 사라진 난파선 같이 되어버렸다.
그후에도 수없이 많은 곡절을 겪어 한일회담은 오년이 돼서야 타결 됐다. <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