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종이를 만들고 종이는 인간을 만들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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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2호 32면

저자: 이언 샌섬 출판사: 반비 가격: 1만8000원

간만에 책상 정리를 했다. 노트북 양 옆 그득히 쌓인 자료와 메모들. 그 안에 내 몇 달간의 행동 반경이 담겨 있었다. 버리지 못해 쌓아뒀지만 굳이 남겨둘 이유도 없어 보였다. 그런데 싹 치우고 나니 어딘지 아쉬운 마음이 동했다. 빨리 새 것들로 공간을 채워야할 것 같았다.

『페이퍼 엘레지』

때마침 만난 『페이퍼 엘레지』가 그 뜻 모를 아쉬움의 정체를 밝혀줬다. 정보 기술의 발달로 종이 책과 종이 신문이 사라지는 시대, ‘종이의 죽음’을 섣불리 외치는 사람들에게 분연히 맞서는 ‘종이 영생론’이다. 코믹 미스터리 소설로 유명한 저자는 미스터리의 독특한 형식을 빌려 ‘종이의 탄생과 진화’라는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에 입체적으로 접근했다.

이메일의 창궐로 손 편지를 쓰는 사람은 확 줄었지만 우편함은 더 많은 고지서와 광고 전단으로 넘쳐나듯, 21세기에 종이 소비량은 오히려 늘었다. 저자의 말대로 우리 모두는 ‘종이로 만들어진 사람’들이기에 결코 종이를 떠날 수 없다. 물티슈에서 건축물까지, 종이 없는 세상은 상상하기 어렵다. 그건 마치 공기 없는 지구처럼 죽은 상태나 태어나지 않은 상태와 같다.

종이는 모든 것이자 아무것도 아닌 ‘궁극의 맥거핀’이다. 저자가 이 책을 단순한 종이의 역사책으로 쓰지 않은 것도 그래서다. 종이를 매개로 지도·책·돈·예술·장난감·전쟁의 역사까지 들여다본 이 ‘종이의 문화사’는 종이의 위대한 생명력과 끈질긴 내구성을 직설하지 않고도 그 존재감을 웅변한다. 범인의 자백 없이도 사건 현장이 범행 전모를 말해주는 것처럼.

인간은 종이 위에 지도를 그리면서 세상을 알게 됐다. 종이로 책을 만들어 지식과 사상, 나아가 역사를 세웠다. 현대 경제가 탄생한 것도 지폐의 등장과 함께였다. 건축도 종이와 더불어 발전했다. 종이에 도면을 그리면서부터 예술과 철학을 이해하는 사람이 건축가가 됐다. 새로운 예술도 종이로 인해 가능했다. 피카소의 판지 모형은 조각의 혁명을 이루고 20세기 예술의 표준이 됐다. 종이는 전쟁 무기로도 쓰였다. 18세기 앤 여왕은 전쟁 비용을 대기 위해 종이에 세금을 매겼다. 2차 대전 당시 영국 심리전 전담부대는 이동식 인쇄기를 갖추고 선전용 전단을 살포해 나치에 대응했다. 가장 단순한 장난감도 종이다. 어린 시절엔 종이 한 장으로 딱지도 접고 인형 놀이도 했다. 처음 만나는 극장도 종이 극장이었다. 찰스 디킨스 같은 위대한 작가들도 종이 극장에서 상상력을 키웠다.

종이는 나를 증명하기도 한다. 해외여행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했더라도 여권을 깜박하면 국경을 넘을 수 없다. 신분 증명은 개인을 넘어 어떤 집단이나 국가의 구성원으로 존재하기 위해 필요하다. 신분 증명서의 역사는 국가가 세금을 거두고 법률을 강제하고 병역을 부과하며 교육을 통제해 온 역사기도 하다. 민족 국가는 종이로 세워진 것이다. 심지어 우리는 영적 세계까지 종이에 빚지고 있다. 멀리 루터의 종교개혁이 비텐부르크 성당 정문에 붙인 종이조각에서 시작됐음을 상기하지 않더라도, 종이 부적이 나를 지키고 신성한 장소는 종이 끈을 꼬아 만든 금줄로 구분한다.

이렇게 보니 종이란 인류의 그림자다. 평소 있는지 없는지도 의식하지 않지만 절대 인류 역사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존재. 개인의 삶에서도 마찬가지다. 내가 읽는 책이, 내 책상에 쌓인 자료가 나를 말해준다. 아니 나를 만드는 것이 그 ‘종이’들이다. 오래된 책 한 권, 작은 노트 하나 버리기 힘든 것도 그래서인가 보다.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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