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책 속으로] 종이의 무한 변신, 세상을 일으키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0면

인류는 종이와 그 역사를 함께해왔다. 왼쪽부터 1850~60년대 카슈미르 지역의 제지 기술자를 묘사한 그림, 종이를 만드는 일본 장인을 표현한 18세기 화가 다치바나 민코의 판화, 종이 펄프를 만드는 분쇄기를 그린 최초의 삽화(1607년작·비토리오 존카 작품). [사진 21세기북스]

종이의 역사
니콜라스 A 바스베인스 지음
정지현 옮김, 21세기북스
524쪽, 2만7000원

프랑스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말로 유명하다. 모든 사물을 의심할 수 있더라도, 이처럼 의심하고 있는 나의 존재는 의심할 수 없다는, 자아에 대한 존재인식이다. 종이에도 비슷한 말을 적용할 수 있다. ‘나는 종이를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말이다. 미국의 탐사보도 전문기자가 인류의 삶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종이의 문명사를 추적한 책이다.

 종이는 사실 고대세계의 ‘벤처 아이디어 제품’으로 출발했다. 중국이 화약·나침반과 함께 자국 문명의 3대 발명품으로 자랑할 정도다. 국가의 은밀한 비밀지적재산이던 종이는 전 세계로 전달되면서 비로소 문명사의 핵심으로 우뚝 서게 됐다.

 지은이는 세계로 퍼져나간 종이의 쓰임새가 끝없이 확장돼왔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가벼우면서도 강하고, 그래서 휴대하기 쉽다는 물성 때문이다. 이제 종이는 인간 생활을 온통 지배하고 있다. 읽고 쓰는 인간의 활동은 종이 때문에 일반화된 것이나 다름없다. 종이로 인한 인쇄혁명은 인간을 이전과는 다른 존재로 만들었으니까. 아침부터 시작되는 현대의 위생습관은? 지폐의 유통은? 간단하게 티백으로 차 마시는 여유는 또 어떻고.

 뿐만 아니다. 근대에 종이로 화약을 감싸는 혁신적인 화승총은 전쟁의 방식에 혁신을 가져와 세계사의 진로를 바꿔놓기도 했다. 종이 기표지를 사용하는 투표는 민주주의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가. 물론 종이로 마는 형태의 권련이 나오면서 담배소비가 폭발적으로 늘었다는 부작용도 있기는 하다.

 지은이는 인간의 삶에 영향을 주는 숱한 종이의 용도 중에서 특히 온갖 아이디어를 축적하는 저장수단과 이를 전달하는 메시지 도구로서 역할에 주목한다. 과연 종이 없이 책·신문·잡지·편지·전보·텔렉스·포스터를 비롯한 현대 소통 미디어의 발전이 가능했을까. 종이로 옮기지 않고 저장하지 않고 전달하지 않고 인간의 지적 활동은 어디까지 가능했을까. 쏟아지는 악상을 식탁의 종이 냅킨 등에 기록하지 않고도 그 많은 명곡이 우리의 심금을 울릴 수 있었을까.

 지은이는 이 같은 종이문명의 현장을 직접 찾아 나선다. ‘나의 종이문화유산 답사기’에 해당한다. 중국 윈난성 오지의 전통 제지소를 방문해 중국에서 종이가 나오게 된 자연환경적·문화적 바탕을 살펴본다. 종이를 예술의 경지에 올린 일본의 제지 인간문화재도 만났다. (아쉽게도 한국의 한지 장인은 등장하지 않는다) 종이가 도배지·창호지 등으로 생활문화에 다양하게 활용되는 곳도 빼놓지 않았다.

 특히 눈길이 가는 것은 세계경제를 주도하는 기축통화 ‘달러’의 재료를 만드는 현장이다. 바로 매사추세츠주 서부에 있는 크레인 제지공장이다. 일회용 종이를 대량생산해 우리의 생활문화를 바꿔놓은 크리넥스와 키친타월을 만드는 킴벌리-클라크 공장도 놓칠 수 없다.

 종이의 미래에 대한 진지한 고민도 뒤따른다. 현대는 종이, 특히 종이매체의 운명에 대해 비관적인 견해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숲 속의 나무를 잘라서 분쇄하고 거기서 얻은 펄프를 각종 약품으로 처리해서 만든 종이. 거기에 하루가 지난 소식이나 꽤 묵은 인간의 지식을 문자로 표기해서 인쇄하고 유통하는 게 책이요, 신문이지 않은가.

 하지만 지은이는 종이는 시대의 변화에 맞춘 끊임없는 변신으로 자신의 존재가치를 더해왔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21세기에도 종이는 그 쓰임새가 끝없이 확장될 것이라고 낙관한다. 종이의 마력은 죽지도, 조용히 사라지지도 않으며 다만 종이가 소비되는 형태만 바뀔 것이라는 전망이다.

채인택 논설위원

[S BOX] 예술 도구, 치유 수단 … 종이는 만병통치약

종이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또 한 권의 신간이 있다. 영국 소설가 이언 샌섬의 『페이퍼 엘레지』(홍한별 옮김, 반비, 322쪽, 1만8000원)다. 작가는 “우리는 종이로 된 세상에서 산다”며 책을 시작한다. 종이의 용도는 끝이 없으며 인간이 미처 생각하지도 못한 방향으로 끝없이 진화한다는 지론을 펼친다.

 주목되는 게 예술도구로서 종이다. 그림의 바탕이 되는 것은 물론 그 자체로 새로운 예술도구가 되기도 한다. 예로 마티스는 가위로 종이를 자르는 기법으로 새로운 종류의 작품을 창작했다. 그는 전설의 발레흥행사 디아길레프의 부탁으로 발레 의상을 디자인하면서 종이 자르기를 디자인에 응용했다. 이 기법으로 만든 삽화로 1940년대에 재즈 음반 표지도 만들었다. 종이를 2차원과 3차원을 아우르는 소재로 사용한 것이다.

 종이는 담백하기에 어떠한 새로움도 수용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심지어 종이 접기와 오리기는 예술을 넘어 정신과 육체의 병을 치료하는 데도 이용되고 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