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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양선희의 시시각각

영화 명량은 역사 왜곡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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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양선희
양선희 기자 중앙일보
양선희
논설위원

이순신 장군의 정유년(1597년·명량해전 당시) 일기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간단한 사실만 기록했고, 다른 하나는 좀 더 자세하다. 자세한 일기에 기록된 경상우수사 배설(裵楔) 관련 내용은 이렇다.

 8월 17일 군영(軍營·강진)에 도착하니 아무도 없었다. 경상수사 배설은 내가 탈 배를 보내지 않았다/18일 회령포로 갔다. 배설은 뱃멀미를 핑계로 나오지 않았다/19일 장수들에게 교서(敎書)에 숙배하게 했는데, 배설은 순순히 받들지 않았다/25일 당포의 어부가 피란민의 소를 훔쳐가면서 왜적이 왔다고 헛소문을 내 놀라게 했다. (헛소문이라는 걸 알고) 군사들은 안정됐지만, 배설은 벌써 도망쳤다/27일 배설이 왔는데 겁에 질려 떨었다. 나는 슬쩍 “수사는 어디로 옮겨갔던 게 아닙니까?”라고 말했다/ 30일 배설이 적이 몰려올 것을 걱정해 도망가려고 했다. 그래서 그의 부하 장수들을 불러 거느렸다. 배설이 노비를 시켜 “병이 심해 몸조리를 하고 싶다”고 청했다. 육지에서 몸조리하라고 공문을 보냈다. 배설은 우수영을 떠나 육지로 올라갔다/ 9월 2일 배설이 도망갔다.

 이 기록을 새삼 들춰본 것은 이번 추석에 ‘핫’한 조상 이슈를 던진 분이 배설 장군이어서다. 그의 후손들이 “영화 ‘명량’이 배설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상영 중지 요청과 제작진을 고소하겠다고 나섰다. 이순신 장군과의 갈등은 위 기록 정도인데, 영화에선 배설이 암살 시도에다 거북선을 불태우는 ‘악당’으로 묘사됐다는 이유다.

 솔직히 영화를 보며 이런 사태를 예상했었다. 실은 배설뿐 아니라 대장선만 놔두고 뒤로 쑥 빠졌던 다른 함선 지휘관의 후손도 논란을 벌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문중마다 자기 조상에 대한 평가를 문제 삼는 건 흔한 광경이어서다.

 ‘자손이 출세하면 조상을 붓으로 키운다’는 옛말이 있다. 이처럼 우리나라에서 조상의 위상은 후손의 현재 위상과 맞물려 있다. 이에 조선이 개국하며 ‘용비어천가’를 썼듯이 각 가문마다 조상의 업적을 기리고 숭배하는 ‘문중사학’이 번성한다. 이런 문중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결함이 없고, 그의 역사적 과오는 정적(政敵)의 모함으로 돌리는 일도 흔하다. 그래서 소설·영화 같은 허구의 창작물뿐 아니라 역사학자의 인물 해석도 문중의 비위를 건드렸다간 각종 시비에 휘말리기 일쑤다.

 빈발하는 조상 관련 소송에 법원에선 “사자명예훼손은 유족만이 그 구제 절차를 밟을 수 있고, 후손들은 특별한 조치를 취할 수 없다”는 취지의 판결을 잇따라 내려도 문중의 소송은 끊이지 않는다. 실제로 이런 소송은 그 자체로 작가들을 압박해 창작의지를 꺾는 데 유용하다. 나도 법조 출입 당시 이런 분쟁이 얼마나 집요한지 목격한 뒤 우리나라 역사소설은 쓰지 않겠다고 결심했을 정도다. 그래서 역사소설은 중국에서 소재를 찾는다.

 우리에겐 많은 역사적 인물이 있지만 안타깝게도 기억나는 인물은 몇 명 없다. 조상의 역사가 중요한 건 그들의 공적·실수·과오를 평가하고 논쟁하는 과정에서 역사가 반복되는 현실을 살아갈 지혜와 교훈을 얻기 위함이다. 한데 실수와 과오가 없는, 미화되고 분식된 문중의 조상들이 그런 생생한 교훈을 줄 수 있을까.

 영화 속 배설은 사실과 다르다. 그러나 그건 영화다. 이를 통해 우리는 배설이라는 인물을 알게 됐다. 기록에 따르면 배설은 1599년 선산에서 권율(權慄)에게 붙잡혀 서울에서 참형됐지만, 그 후 무공이 인정돼 선무원종공신 1등에 책록됐다. 이순신 장군이 명량에서 싸운 배 12척은 그가 칠천해전에서 보존해낸 배들이다. 사람의 일이란 이렇게 의도치 않은 일들이 얽히고설켜 성사된다. 그러니 한 사람의 인생을 단순히 공과선악(功過善惡)으로만 평가할 수는 없다. 한 인물을 총체적으로 탐색하고 평가하는 작업을 통해 우리 정신적 자산은 더욱 풍부해질 수 있다. 우리 조상들을 문중의 인물로 과보호할 게 아니라 공공의 자산으로 풀어줄 때가 되지 않았을까.

양선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