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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북경의 봄」은 여인들에게 먼저|동포인민공사 홍신대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하르빈 동남방 65㎞쯤 떨어진 아성현은 중공전국을 통해 농업생산성이 높은 곳으로 유명하다. 이 현의 시범인민공사는 14㏊의 집단경작지에 살고있는 1백68가구의 한인 동포들이 완전히 운영하는 홍신대대로 알려져 있다.
한 중공관리는『당 현의 성공에 대체로 한인들의 인민공사대대가 비상한 공헌을 했는데 그중 홍신대대가 특히 그랬다』고 설명했다.
36세의 훤칠한 한인동포 서씨(홍신대대 당서기)는 대대현황을 간략한 수치와 사실로 짧게 소개했다.

<부속공장도 4개>
『미각생산이 주업이지만 우리 대대에는 기계·목공·전기·벽돌공장 등 4개의 소규모공장이 있습니다. l백80명의 농부와 1백명의 공원이 우리의 노동력이랍니다.
농업생산보다 공장 일에서 더 높은 소득을 올리고 있다고 설명한 그는 작년의 경우 농업소득이 35만원이었던데 비해 공장에서 54만원의 수입을 올렸고 금년에는 그 격차가 1대2로 나타날 것이라고 덧 붙였다.
l백68가구 중 45가구가 빨간 벽돌집에, 그 나머지가 한국의 전통적인 초가집에 각각 살고 있다.『우리 대대에는 총인구가 8백37명인데 자전거 90대, 재봉틀 1백30대, 벽시계 6백20개, 카세트녹음기 10대, 텔레비전 수상기 4대를 보유하고 있으며 가구마다 라디오 1대씩을 소유하고 있다』고 그는 말했다.
뜰로 나서자 장비가 보였는데 서씨는『큰 트럭 4대와 용달차 3대, 수동트랙터 7대, 수동탈곡기 12대 등이 있는데 이만한 규모의 집단농장으로는 작은 것이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시멘트와 붉은 벽돌로 된 학교는 30여명을 가르치는 유치원과 l백명의 학생을 순정히 우리말로 교육하는 국민학교(선생 12명)로 나누어져 있었다.
아이들은 나를 위해 한국민속춤과 노래를 불렀는데 서투르기는 해도 매우 귀엽고 감동적이었다.

<보신탕 대접받아>
한 공장의 바깥에서 휴식을 즐기던 10여명의 여자들은 사진을 찍자고 하니 좋아라고 자세를 취해주었다. 내가 뉴욕에서 왔으며 그곳에는 10만명의 동포들이 서로 다른 직업을 가지고 살고있다고 설명하자 그들은 나에게 남한에는 자주 방문하느냐, 그렇다면 남한이 어떠냐고 대단한 관심으로 질문공세를 폈다.
『남한의 경제발전과 높은 생활수준이 사실이냐』고 한 늙은 부인이 물었다.『물론 사실이지요. 그런데 그걸 어떻게 아셨나요?』라고 내가 묻자『우리는 KBS방송과 다른 방송을 듣고있다』고 그들은 대답했다. 다수가 경상도와 전라도 출신이라고 말한 그들은 몇몇은 고향의 친척들과 편지도 주고받는다고 했다.
『고향을 가보고 싶지 않습니까?』내가 이렇게 묻자 그들은 이구동성으로『왜 아닙니까. 가보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요. 그러나 어떻게요? 우린 갈 돈도 없고 갈 수만 있다면 가고싶지요…』라고 말했다.
서씨는 나의 팔을 끼고 점심이나 들자고 붉은 벽돌가정집으로 이끌었다. 초가집으로 안내되길 바랐던 내가 약간 실망하자 서씨는 방이나 주방시설·구조 등은 초가집이나 벽돌집이나 똑같다고 설명했다.
문 곁에 있는 방은 반은 한자높이의 온돌이고 반은 시멘트 바닥이었다. 시멘트바닥 가운데 높인 둥근 식탁주위에 8명이 쭉 둘러앉았다. 대연장, 대대당서기, 젊은 집주인, 하르빈에서 수행한 동포성 관리 송씨, 그리고 나와, 동네사람 3명이었다.
젊은 주인은『어머니께서 손님을 위해 보신탕을 준비했습니다. 어제 송 선생이 전화로 손님께서 보신탕을 먹어봤으면 한다고 알려 왔답니다. 모쪼록 손님께서 맛있게 드신다면 고맙겠읍니다』라고 부드럽게 말했다.
나는 설마 만주에서 보신탕을 먹어 볼 줄이야 생각도 못했다. 보신탕용 개가 만주에서 구하기가 힘들다는 사실을 알고있던 나는 송씨와 집주인, 그리고 그 모친의 배려와 준비에 눈시울이 뜨거웠다.
곧 음식이 한·중 혼합형식으로 들어왔고 소주와 맥주가 곁들여졌다. 점심식사의 결정은 보신탕 차례였다. 찰게 썬 잘 익은 살점과 국물은 하도 연하고 감치게 맛있어 보신탕의 진미를 만끽했다. 양념이 또 기가 막히게 잘 준비되어 있었다.
나는 부엌으로 달려나가 노부인에게 뛰어난 음식솜씨에 대해 찬사를 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노부인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면서『이곳에는 한국식 양념을 두루 갖추기가 아주 힘들지요. 그래서 음식이 중·한 혼합형식이니 양해해주시기 바랄 뿐입니다』고 오히려 겸손해했다.
벌써 연로한 정 대대장은 술이 취해 카세트녹음기에서 흘러나오는 한국민요에 맞춰 흥얼거리며 춤을 추고 있었다.『춤춥시다. 우리 밤 내내 춤을 춥시다. 오늘밤 손님은 이곳에서 보내야 해요』라고 그는 나에게 말했다.
우리들은 손뼉을 열심히 쳐댔다. 송 서기는『저 노인네는 오랫동안 모범농민이었지요. 직위는 대대장이지만 이젠 은퇴했답니다. 저이는 자신이 열심히 일한 덕으로 노년을 정말 즐기고 있답니다』 라고 속삭였다.
나는 불현듯 그 노인이 식사 전에 한말을 상기했다.『처음 하르빈에 왔을 때 생활의 고초야 참 말할 수 없을 정도였지요. 날씨가 따뜻한 경상도에서 온 우리는 이곳에서 12월부터 2월까지 늘 폭설이 내리는 가운데 평균기온이 영하30도나 되는 살을 도려내는 추위를 견뎌 내야했지요. 우리는 늘상 춥고 배고프고 가난에 쪼들렸지요 지금도 물질적으로 윤택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먹고 일하고 마시며 살지요. 우리는 이제 배고프거나 춥지는 않지요. 우리의 유일한 희망은 남한에 있는 친척들을 만나보는 것이지요.
『북한에서는 이런 장면을 상상조차 할 수 없지요. 이곳 사람들은 정말 생활과 일을 즐겁게 하는 방법에 이력이 트였다고나 할까요.』나는 말했다.

<조국의 방송 들어>
그들 모두는 즉각『언제 북한에 가셨지요』라고 물었다.
『몇 년 전이지요』라는 내 말에 중년의 한 농부는『아주 실망했겠지요. 적어도 수년 전 그곳 친척을 방문했던 제 경우는 그랬답니다. 남한의 농민들의 생활은 어떤가요』라고 말했다.
『그들은 열심히 일하고 노동의 결실을 즐기는 것 같아요. 그들 역시 마시고 먹고 노래하고 춤추며 인생을 즐기지요』라고 나는 대답했다.『조국이 다시 통일되어 남한을 방문할 수 있을 때까지 우리는 아마 기다려야겠지요』라며 그는 한숨을 쉬었다.
그들은 또「가능하다면」남한의 책·화보·민속가요테이프 같은 것을 받아보았으면 하는 소망을 비쳤다.『KBS라디오방송과 기타 뉴스매체들이 우리가 남한을 자꾸만 생각하고 알아보도록 부추기고 있지요』라고 그들은 말했다.
나는 많은 한인동포들이 한국에 가는 출국비자를 얻어 조국의 국적기를 타고 홍콩에서 서울로 가는 것이 그들의「오랜 염원」이라는 말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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