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호준의 세컨드샷] 번호로 선수 구분은 비인간적 … 우즈처럼 예명 쓰는 건 어떨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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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0호 23면

“김혜림 투와 김현수 쓰리가 공동 선두이고요, 이정은 세븐틴과 김민선 투앤티원이 한 타 차입니다.”

동명이인 늘어나는 KLPGA의 고민

 이십년쯤 지나 한국여자프로골프 방송을 보면 이런 멘트가 나올 수 있다. 농담이 아니다.

 한국여자프로골프협회는 정회원 중 같은 이름이 나오면 순서에 따라 2, 3, 4 같은 번호를 매겨 놓는다. 여러 이름이 선점당한 상태라 앞으로는 대부분의 선수들이 이름에 숫자를 붙여야 할 것이다. 이미 번호는 5(이정은, 김민선, 이수진, 김민지)까지 갔다. 회원이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4같은 숫자가 나오면 패스를 하고(영구결번 처리된다) 다음 숫자로 넘어갈 수 있기 때문에 번호 증가 폭은 빨라질 것이다.

 왜 그래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숫자는 영어로 읽는다. “이정은 세븐틴, 김민선 투앤티원”같은 어려운 발음을 해야 한다.

 협회로선 번호를 붙여 두면 편하다. 서부 카우보이들이 소에 낙인을 찍거나, 어린 학생들에게 ‘앉으면서 번호’를 시켜 인원을 파악 하는 것처럼 쉽다.

 그러나 남의 이름을 마음대로 바꾸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특히 이름에 숫자를 넣으면 뉘앙스가 나빠진다. 물건에 붙인 시리얼 넘버인 듯도 하고 ‘25번 올빼미’ 등을 외치던 군대 유격훈련 느낌도 난다.

 협회 내부적으로는 이름에 숫자를 붙여 구분하더라도 외부에는 이름만 쓰는 것이 당연하다.

 협회는 “똑같은 이름이 너무 많아 어쩔 수 없다”고 하소연한다. 그러나 동명이인을 구분하기 위해 뭔가 필요하다면 숫자보다는 거주지나 특징·소속 등을 쓰는 것이 기억하기 좋다. 축구 대표팀에 박지성이 둘이라면 “큰 박지성이 빠른 박지성에게 패스했다”고 하는 것이 “박지성 원이 박지성 투에게 패스했다”고 하는 것 보다 팬들의 이해가 쉽다.

 그래도 구분이 어렵다면 숫자를 써야 하겠지만 최대한 자제해야 한다. 남자협회인 KPGA는 대회 출전권이 없으면 동명이인 대상에서 제외한다.

 여자협회는 협회 편한대로 선수 번호를 단다. 현재 여자 투어 선수(출전권이 있는 회원) 중 동명이인은 김민선과 김지현 각 두 명씩 뿐이다. 구분을 위해 뭔가 표시를 해야 하는 선수는 총 4명이란 말이다. 그런데 올해 투어에 나온 선수 중 무려 17명이 주렁주렁 숫자를 달고 다닌다. 선수인지 아닌지, 현역 선수인지 은퇴 선수인지 여부에 상관없이 모두 하나의 카테고리로 놓고 구분을 해서 숫자를 붙여 생긴 결과다. 학교로 치면 졸업생까지 모두 포함시켜 동명이인 숫자를 부여한 꼴이다.

 왜 그럴까. 한국 남녀 프로골프 협회는 선수를 위한 대회 사무국일뿐 만 아니라 일반 프로들이 포함된 이익단체여서다. 팬들은 선수 이외에는 관심이 없지만 협회는 일반 프로도 챙겨야 한다.

 미국 LPGA 투어에선 아직 이름이 똑같은 선수가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LPGA가 선수가 아닌 일반 프로들까지 포함시켰다면 상황은 달랐을 것이다. LPGA 투어는 팬과 선수를 위한 조직이고, KLPGA는 모든 프로를 위한 조직이라는 것이 동명이인 대량 발생의 가장 큰 이유다.

 동명이인은 계속 나올 것이다. 사실 한국인들의 성씨 종류가 적고 이름의 풀도 작다. 이름도 유행을 타서 또래에 비슷한 이름이 많이 나온다. 그렇다고 우리 조상의 창의력만 탓할 건 아니다.

 타의에 의해 이름에 꼬리표가 붙느니 자발적으로 등록이름을 바꾸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타이거 우즈가 원래 호랑이는 아니었다. 본명은 엘드릭 톤트 우즈다. 미국프로농구 선수였던 론 아티스트는 세계평화를 위한다면서 메타 월드피스로 개명하더니 중국 리그로 진출하면서는 판다스 프랜드(판다의 친구)로 이름을 또 바꿨다. 장난스럽긴 하지만 개성이 있다. 이정은 세븐틴 보다는 이소렌스탐이 나아 보인다.

성호준 기자 kari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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