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스파이더 맨' 더 이상 공상만은 아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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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현대 생물학은 다른 생물의 DNA 조각을 오려붙일 수 있는 수준까지 왔다. 거미줄을 분비하는 염소는 과학자들이 실제로 만들어냈다. ‘스파이더 맨’이 공상만은 아닌 셈이다. 사진은 영화 ‘스파이더맨3’의 한 장면에 DNA의 나선형 구조를 합성해 그래픽화했다. [사진 소니픽쳐스]

크리에이션:
생명의 기원과 미래
애덤 러더퍼드 지음
김학영 옮김, 중앙북스
384쪽, 1만8000원

미국 유타주립대 연구팀이 키우는 염소의 이름은 프레클스(Freckles)다. 겉보기엔 다른 염소와 차이가 없다. 하지만 유전자를 들여다보면 뭔가 다르다. 유전물질인 DNA에 거미에게서 가져온 조각이 하나 들어 있다. 프레클스는 이 때문에 거미줄 섬유가 가득한 젖을 분비한다. ‘스파이더 염소’인 셈이다.

 MIT에선 더 놀라운 연구가 진행 중이다. ‘암살자 바이러스’를 개발하고 있다. 이 바이러스는 암세포를 확인한 뒤 처단하는 DNA를 보유했다. 암세포에 해당하는 특질 5가지가 이 바이러스의 DNA 논리회로에 확인되면 가차없이 암살한다. 똑똑하면서 성실하고, 파괴적이면서 빈틈없는 암살자다. 하지만 아직은 미완성이다. 지금의 연구 수준으로는 이 바이러스가 우리 몸에 들어가자마자 면역 체계가 바로 이 암살자를 암살하고 말 것이다.

 현대적 의미의 생물학이 태어난 지 불과 150년. 이 젊은 학문은 신(神)의 영역에 도전하고 있다. 이 책은 21세기 들어서 가장 각광받는 과학 분야인 생물학의 과거·현재·미래를 한 눈에 보여준다.

 지금의 생물학은 자신만만하기 그지 없지만 19세기 중반까지만 거슬러 올라가도 미신과 얼뜨기 과학이 뒤섞인 난장판이었다. 딱 한 사람의 책임으로 돌리자면 아리스토텔레스를 지목할 수 있겠다. 2200년 전 그는 『동물계(Animalia)』에서 ‘자연발생설’을 주창했다. “어떤 동물은 (…) 자연발생적으로 생긴다. (…) 부패한 흙이나 썩은 채소 더미에서 생기기도 하며 동물 몸 속 기관들의 분비물로부터 자연적으로 발생한다.”

 지금 들어보면 ‘이 무슨 얼토당토 않은 소리인가’ 싶지만 19세기만 해도 저명한 과학자까지 동조했기에 쉽사리 깨기 힘든 가설이었다. 1860년이 돼서야 자연발생설은 종말을 고한다. 파스퇴르가 기발한 실험 장치를 고안해 세균과 곰팡이가 저절로 생겨날 수 없음을 증명한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젊은 박물학자 다윈이 5년간의 세계 항해를 마치고 ‘진화’와 ‘자연선택설’을 명쾌하게 정리한 『종의 기원』을 출간했다. 이런 노력에 힘입어 생물학은 과학 분야의 신생 학문으로 역사에 당당하게 들어선다.

 이후의 발전은 패기만만한 젊은이의 발걸음처럼 당차고 눈부시다. 1860년대 오스트리아의 성직자 멘델이 유전자의 존재를 시사했고, 1920년대 미국 과학자 모건은 유전자의 위치를 특정했다. 1940년대 들어선 유전물질이 DNA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리고 드디어 1953년, 영국 케임브리지대 과학자 프랜시스 크릭과 제임스 왓슨이 DNA의 구조와 특성을 밝혀냈다. 생명의 암호를 담은 DNA의 실체가 드러난 것이다. 이후 과학자들은 DNA를 파고들기 시작했다.

 지금의 생물학은 DNA 조각을 조립해 새로운 피조물을 만들 수 있는 수준까지 왔다. 몇 해 전 성공한 인간의 유전자 지도 해독은 지금에 와서 보면 장난에 불과하다. 지금은 일반인이 바이오회사에서 DNA 조각을 주문해 스스로 조립해 볼 수도 있다. 요즘 생물학을 전공하는 대학생들은 박테리아에 독성 물질을 감지하면 색을 내도록 하는 DNA를 삽입하기도 한다. 너도나도 조물주가 될 수 있는 세상이 열린 것이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두려움이 슬몃 고개를 든다. 유전자 조작 작물을 반대하는 운동은 여전히 거세다. 몇몇 언론은 대량 살상이 가능한 생물학 무기가 나올 수 있다는 우려도 나타낸다. 영국의 유전학자이자 과학저널리스트인 저자는 “정확한 정보를 근거로 공개적인 논의를 합리적으로 이뤄야 한다”며 이런 우려가 설득력이 부족하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이래도 될까’하는 찜찜한 구석이 남는 건 사실이다.

 책은 ‘생명의 기원’과 ‘생명의 미래’ 두 부분으로 나뉜다. 생물학의 주요 개념을 익히려면 앞부분, DNA 연구가 열어갈 미래가 궁금하다면 뒷부분만 읽어도 괜찮을 듯싶다.

이정봉 기자

방탄복보다 강도 높은 거미줄 … 2억 년 진화의 무기

왜 하필 거미일까. 만화가의 상상력은 손목에서 거미줄을 뽑는 ‘스파이더 맨’을 창조했다. 미국 연구진은 젖에서 거미줄 섬유를 낼 수 있는 염소를 만든다. 거미줄 섬유가 기막힌 특징을 갖고 있어서다.

 아직 인류는 거미줄만한 섬유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강도·탄성이 각각 높은 섬유는 만들지만 두 가지가 동시에 높은 섬유는 못 만든다. 거미줄은 방탄복에 쓰이는 케블러(kevlar)보다 강도가 높다. 또 인체의 면역 체계에 부작용이 없고 물에 녹지도 않는다. 거미가 2억 년간 진화하면서 이뤄낸 걸 수천 년 역사의 인류가 따라잡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거미는 사육이 불가능하다. 한 곳에 모여 있으면 동족을 잡아먹는 경향이 있다. 상용화되지 못한 이유다. ‘스파이더 염소’가 보급되면 인대 복원 수술 등에 거미줄을 사용할 수 있게 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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