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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나를 흔든 시 한 줄

성석제 소설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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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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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수록, 일월(日月)이여,

내 마음 더 여리어져

가는 8월을 견딜 수 없네.

9월도 시월도

견딜 수 없네.

흘러가는 것들을

견딜 수 없네.

(중략)

모든 흔적은 상흔(傷痕)이니

흐르고 변하는 것들이여

아프고 아픈 것들이여.

- 정현종(1939~ ) ‘견딜 수 없네’

정현종 시인은 나라는 전(前) 시인을 문학의 길로 인도한 분이고 사적으로는 내게 평생의 스승이다. 그렇지만 사제지간이라는 명분 때문에 그분이 시인임을 잊고 있었던 때가 더러 있었다. 그러다가 날벼락처럼 이 시를 만났다. 이십대 초반에 스승을 만난 지 이십 년이 다 되어서였다.

 전 시인인 나 역시 ‘여름의 자매들’이라는, 7·8·9월에 관한 미완성 시고를 몇 년 동안이나 붙들고 있다가 천상의 운무 같은 시에서 소설이라는 인간세의 저잣거리로 ‘아래로 아래로 날아’(‘고통의 축제 2’) 올랐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 시처럼 절실하고 완전무결하게, 그야말로 ‘고통의 축제’의 밤하늘에 불타오르는 황홀한 불덩어리처럼 내 마음을 사로잡은 건 시에도 소설에도 없었다. 존재의 무력감과 슬픔에 흠뻑 젖게 하면서도 나 또한 너와 함께하고 있노라고 따뜻하게 껴안고 위안을 주는 대비(大悲)의 시였다.

 ‘모든 흔적은 상흔 ’이라는 구절이 요즘처럼 가슴을 아프게 때릴 때가 있을까. 이 작품은 앞으로도 누추한 시대(흐르고 변하는 것)와 오욕된 현실(아프고 아픈 것들)에 의해 거듭 날이 시퍼렇게 벼려지고 호출되며 내내 유전할 것이다.

성석제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