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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소기업 대출 2조9000억 풀어도 … 현장선 '안 풀리네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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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3면

지난해 6월 자동차 부품 업체를 세운 이모 사장은 한 시중은행에서 초기 운용자금으로 5억원을 빌렸다. 담보는 퇴직금 3000만원을 들여 갖춘 기계설비뿐이었다. 은행측은 담보보다는 25년간 자동차 회사에 근무했던 이 사장의 경험과 신소재 개발 기술에 주목했다. 무형의 기술이 담보가 된 이른바 ‘기술 금융’이다. 덕분에 권고퇴직 이후 카드론과 현금서비스로 사업자금을 마련하던 그는 이제 자신이 다니던 회사에 부품을 댄다. 이 사장을 담당하는 은행 직원은 “섣불리 대출을 해줬다 돈을 떼일 위험이 있다는 우려도 내부에 있었다”면서 “하지만 3개월 단위로 대출을 연장하며 꾸준히 업체를 관리하고, 신용을 관리하는 방법도 조언해준 결과 모두가 만족하는 결과를 내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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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행들이 중소기업에 눈을 돌리고 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달 말 기준으로 국내은행의 중소기업대출 잔액은 511조7000억원으로 한달 전에 비해 2조9000억원 늘었다. 대기업 대출 잔액(178조3000억원)이 같은 기간 동안 1000억원 줄면서 두 달째 감소세를 이어간 것과 반대다.

 신한은행은 올해 기업대출 목표액 중 90% 가량을 중소기업에 할당했다. 중소기업 대출 잔액이 58조6421억원(이달 8일 기준)으로 1년새 3조5000억원 늘었다. 하나은행은 지난해부터 중기 대출을 영업점 평가에 반영한다. 중기 금융지원 실적이 없는 영업점에 불이익을 주고, ‘중기 애로상담 센터’도 만들었다. KB국민은행은 지난해 3월부터 기업신용개선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지난달 말까지 22개 기업을 대상으로 973억원의 자금을 지원했다.

 은행들이 이처럼 경쟁적으로 나서는 데는 중소기업 대출을 늘리라는 정부의 ‘어르고, 달래기’가 한 몫을 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최근 ‘금융 보신주의’를 연거푸 질타하고 나서면서 금융당국도 연일 ‘기술금융’ 확산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이에 따라 기술금융 관련 상품도 쏟아지고 있다. 신한은행은 연대보증이 필요없는 ‘우수기술 창업중소기업대출’과 ‘기술평가(TCB) 우수 기업대출’ 등 지난달에만 2건을 출시했다. 우리은행과 기업은행도 각각 ‘우리창조 기술우수기업 대출’, ‘기술평가기반 무보증신용대출’ 등 신상품을 내놨다. 중소기업 전용 통장도 나왔다. 한국씨티은행은 10억원 이상을 하루만 맡겨도 연 2.0% 금리를 주는 ‘참 착한 기업 통장’을 출시했다.

 저금리에 수익 낼 곳이 드물어진 환경도 은행이 중소기업을 찾아 나서게 한 계기다. 곳간이 넉넉한 대기업은 굳이 은행 돈을 빌리려 하지 않는데다, 부동산 경기 침체가 장기화하면서 가계대출을 늘리기도 쉽지 않다. 시중은행의 한 임원은 “연초 경영 계획을 세울 때부터 중소기업에 집중하기로 했다”면서 “신용이 좋은 대기업은 은행 대출금리보다 낮은 금리로 회사채를 발행할 수 있어 시장이 포화 상태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모든 중소기업에 온기가 돌고 있는 건 아니다. 돈은 우량 중소기업이라는 ‘아랫목’에만 쏠릴 뿐 여전히 ‘윗목’은 차갑다는 게 기업인들의 얘기다. 중소기업중앙회 고수진 과장은 “그간 대출을 못받던 기업은 여전히 어려워 중소기업내에서도 자금사정이 양극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통 제조업이 아닌 보건의료·콘텐트·소프트웨어 같은 서비스산업들도 상대적으로 소외돼 있다. 무엇보다 새로운 산업에 대한 금융사 담당자들의 이해가 부족해 투자나 대출을 받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는 호소다. 영화배급업체인 넥스트엔터테인먼트월드의 장경익 대표는 “과거엔 영화로 돈을 벌기 힘들다는 얘기가 많았지만 이제는 미국 헐리우드 영화가 한국영화를 피해 개봉할 정도가 됐다”며 “벤처캐피탈 뿐 아니라 은행이나 자산운용사들도 이런 산업의 변화를 읽고 다양한 방식으로 투자에 나섰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일양약품의 김동연 대표는 “제약업의 특성상 지속적인 연구개발이 필요한데 담보 위주의 대출 관행 때문에 자금난에 시달리다 개발중인 약을 해외 기업에 싼값에 넘겨야 하는 일도 벌어지고 있다”고 전했다. 창업기업들은 사정이 더 안좋다. 박광문 서경전자 대표는 “사업실적·재무상황 등을 위주로 평가하면 막 창업한 곳은 일반기업에 비해 매우 불리하다”며 “사업성과 미래성장성을 중심으로 평가할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은행들이 중소기업이라는 ‘블루오션’을 개척하기 위해선 하루빨리 기술력과 전망을 평가하는 안목을 키워야 한다고 조언한다. 금융연구원 손상호 선임연구위원은 “은행이 살기 위해서라도 기업의 옥석을 제대로 가려낼 능력을 갖춰야 한다”면서 “그렇지 못하면 새로운 수익원도 못하고, 보신주의 비판에서도 영영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심새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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