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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98)제73화 증권시장(36)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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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바람 잘날 없는 증권계>
우리 나라의 초기 증권시장은 파동의 연속이었다.
이미 보아온 62년 「5월 파동」, 64년의 「해동화재주 파동」 이후에도 크고 작은 파동이 잇달았다.
69년 말부터 태동하여 71년에 막을 내린 증금주 파동이 파동으로서는 마지막을 장식한 셈이다. 이 증금주 파동에 대해서는 앞으로 말하겠으나 62년부터 3년 동안은 이러한 파동 때문에 증권업계는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업자들의 회의가 끊일 새 없었고 업자들 건의가 홍수를 이루었다.
하룻밤 자고 나면 어제 있던 증권회사가 없어졌고 내일이면 또 새로운 회사가 생겨나는 것이었다.
62년의 경우 증권업협회 총회가 임시 12회에 정기 1회를 합쳐 13회나 열렸다.
이사회는 정기 9회에 임시 63회를 합쳐 모두 72회나 열렸다.
한달 평균 7회 이상이나 총회와 이사회가 열린 셈이다.
이밖에 긴박한 사태가 발생하면 대책수립을 위해 각종 분과위원회가 구성되어 모임을 가졌다.
62년도에는 분과위원회가 16개(63년에는 7개)나 구성되어 뻔질나게 회합을 가졌다. 결국 하루도 회의가 없는 날이 없을 정도로 회의 풍년이었다.
회의시간은 보통 4∼5시간이나 걸렸다. 어떤 때는 9시간10분이나 걸릴 때도 있었으니 당시 사태의 복잡성과 어려움을 짐작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5월 파동 때는 이의 수습을 위해 시장 입회장에서 회의를 가지기도 했다. 야간회의는 비일비재하였으며, 재무부와의 절충을 위해 휴회를 한 뒤 다음날 아침 속개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일화 한 토막. 작고한 지덕영씨가 협회장이고 황종률씨가 재무부 장관이던 때로 기억된다.
협회의 회의도중 재무부와 절충할 일이 생겨 휴회를 하고 회장단(필자는 분과위원회 대표로 동행)이 재무부에 들어갔다.
장관을 만나려 했으나 비서실에서 보기 좋게 거절당했다.
당시만 하더라도 당국자들에게는 증권시장이 한낱 괴롭기 만한 존재였다.
없앨 수도 없고 그냥 두자니 뾰족한 운영방안이 없었다. 잘못 처리했다가는 투자자들로부터 원성이 빗발칠 터이니 되도록 멀리하고 접촉을 피하는 것이 상책이라는 분위기였던 것이다.
우리 일행은 난처했다. 장관이 안 만나주려 한다해서 그냥 돌아갈 수도 없었다. 회의실에서 우리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회원들을 생각하면 차마 그대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궁하면 통한다고 했다. 필자는 지혜를 내놓았다.
『지 회장, 아무리 장관이라도 화장실에는 다녀갈 테니 우리 그 앞에서 붙들고 얘기합시다.』 『거참 묘안이요. 그럼 장소가 장소이니 만치 우리 다 가지 말고 두 세 사람만 가서 기다리도록 합시다.』
대표란 것이 그리 쉬운 것은 아니었다.
지 회장과 필자 그리고 또 한 사람 등 셋이서 길목을 지키고 있으려니 과연 황 장관이 일을 보러 들어가는 것이었다. 우리는 기다렸다가 화장실 문을 열고 나오는 황 장관에게 『장관님, 사실은 복도에서 지금 장관님 나오시기만을 기다리던 중입니다. 우리들 얘기를 좀 들어주셔야겠습니다.』 지 회장의 말이 끝나자 황 장관은 껄껄 웃으면서 『내가 미안하게 됐소. 워낙 바쁘다보니 그렇게 됐소. 이해하시오. 자 내방으로 갑시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당면문제를 장관과 협의한 후 기다리고 있던 회원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게 됐다.
이 당시엔 휴장이 많기도 했다. 휴장은 거래소 자체결정에 의한 것도 있었고 당국의 지시에 의한 경우도 있었다.
62년 6월엔 통화개혁으로 인해 1주일간 휴장했다.
8월27일과 9월15일에는 투자자의 소란으로 입회가 중지됐고 12월5일에는 증권금융주 파동으로 13일 간을 휴장했다.
또 다음해인 63년에는 2월25일부터 무기휴장에 들어갔다가 73일 만에 문을 여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주식회사 제도에서 공영제로 바뀐 이후에도 7월17일에는 한국증권 및 증금주 책동전의 증거금을 납부하지 못한 사태로 인해 하루동안 휴장했다. 또 30일에는 해동화재주 책동전의 수습을 위하여 전장입회를 휴지했다.
당시 투자자들의 소란 또한 극심했다. 협회이사회 회의실에 난입하여 난동을 부리기 일쑤였다.
거래소 임원실의 기물을 부수고 방을 강제로 검거하기도 하여 어떤 책임자는 위기를 피해 뒷문으로 빠져나가다 봉변을 당하기도 했다. 투자자들은 또 시장을 차지하여 즉석 투자자 회의를 열기도 했고 재무부에 몰려가서 집단면회를 강요하기도 하는 등 행패를 부린 일도 적지 않았다.
이러한 투자자의 행패는 거래소 총회 때면 더욱 심해졌다. 총회장에는 물론 주주만 참석하게 되어있는 것이지만 투자자나 고객 등이 밀어닥쳐 회의장을 꽉 메웠다.
주가하락 원인을 거래소 이사장에게 덮어 씌워 역대 이사장은 총회 때면 곤욕을 치르곤 했다.
65년 김용갑 이사장 때인 것으로 기억된다.
이때 총회는 창성동에 있던 국민대학 강당에서 열렸는데 주주·고객 등 1천명이 넘는 사람이 장내를 꽉 메웠다. 회의가 진행되면서 투자자들은 정책당국자에 대한 불만이 폭발, 김 이사장에게 집중적으로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러자 화가 치민 김 이사장은 단상에서 사의를 표하고 이사장 자리를 물러난 일까지 있다.
그 후 김씨는 69년쯤 다시 거래소 이사장에 취임, 증금주 파동을 수습하고 증권시장의 근대화 작업에 많음 힘을 기울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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