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닉스 빼고 나면 … 불안한 재계 3위 SK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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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에 나무심고 가꾸는 걸 좋아하셔서 수목장(樹木葬)을 준비했었는데….”

 경기도 화성시 봉담의 SK 선영. 이곳엔 매년 이맘때면 추모객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고(故) 최종현 SK그룹 회장을 기리는 추모식이 열리기 때문이다. 최종현 회장은 1973년 창업주인 형 최종건 회장의 뒤를 이어 25년간 SK를 이끌다가 1998년 타계했다. 그룹의 기반산업인 에너지와 통신사업을 그가 일궜다. 지난 2008년 SK는 최종현 회장을 기리기 위해 그를 수목장 형태로 모시기로 했다. “우리 장묘문화를 바꿔야 한다”는 고인의 뜻을 잇자는 취지도 담겨 있다. 하지만 수목장은 8년째 이뤄지질 못하고 있다. 오너 리더십이 실종된 SK그룹의 위기 상황 때문이다. 수감 중인 최태원(54) 회장과 최재원(51) 부회장 형제의 부재로 26일 열리는 16주기 추모식은 더욱 조촐하게 치러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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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 관계자는 “김창근 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 등 주요 계열사 최고경영자(CEO)만 참석하는 형태로 조용히 추모식을 진행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길어지고 있는 총수의 부재와 그룹 경영 실적 악화가 맞물리면서 SK 임직원들은 요즘 불안감에 휩싸이고 있다. SK 관계자는 “16년간 지속되던 성장세가 회장부재 이후 역성장으로 바뀌고 있지만 좀처럼 돌파구가 보이질 않는다”며 침울해했다.

최태원 회장

  최태원 회장이 38살의 나이로 경영권을 갑작스레 물려받은 1998년 당시 SK의 자산규모는 33조원에 불과했다.

 하지만 2013년말 그룹의 자산은 145조원으로 4.4배 성장했다.

 매출은 4.1배(38조원→157조원), 순이익은 무려 45배(1000억원→4조5000억원)나 커졌다. 임직원수(2만2000명→7만9000명)도 3.6배 불었다. 그사이 모나코 국적의 뉴질랜드계 자산운용 회사인 소버린과의 경영권 분쟁, 글로벌 금융위기 등 숱한 위기도 겪었다.

 하지만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죽는다”는 ‘부진불생(不進不生)’의 경영철학으로 해외 시장에 집중했다. 최 회장은 연간 100일 이상을 업무용 항공기에서 보내며 북남미와 중동, 유럽, 호주를 누볐다. 그 결과 재계 3위로 높아졌다. 가장 큰 변화는 2012년 2월 하이닉스 인수였다. 주변의 반대와 우려를 아랑곳하지 않고 그가 던진 ‘승부수’는 적중했다.

 SK가 품은 하이닉스는 고공행진을 했다. 올 2분기엔 영업이익을 1조838억원을 냈다. 2분기 연속 1조원대의 영업이익이란 호실적에 SK그룹의 영업이익도 덩달아 뛰었다. 하이닉스 인수 효과로 SK는 상반기 기준 영업이익이 2012년 2조2231억원, 이듬해엔 3조8146억원으로 뛰었다.올 상반기에도 3조8800억원(추정치)의 영업이익을 기록할 전망이다.

 그런데 하이닉스를 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하이닉스 인수 전 그룹의 영업이익(상반기)은 2011년 4조27억원에 달했다. 2012년엔 2조4814억원, 2013년 2조3840억원이었지만 올해는 1조7400억원(추정치,하이닉스 실적 제외)으로 급락했다. SK그룹에 위기감이 감도는 이유이기도 하다.

 SK 관계자는 “에너지·화학, 통신사업의 나쁜 영업실적을 반도체로 만회하고 있는 것일 뿐, 시황이 둘쭉날쭉한 반도체 업종 특성상 경기저점에 이르면 그룹 전체가 추락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실제로 에너지와 화학 계열사를 아우르는 지주회사격인 SK이노베이션은 올 2분기에 503억원의 영업적자를 냈다.

 더 큰 문제는 그룹의 미래를 좌우할 대규모 투자가 올스톱 됐다는 점이다.

  최근 아이리버(SK텔레콤) 인수, 반도체 모듈사업 진출(SK C&C) 등의 발표가 있었지만 굵직한 투자는 전무한 상태다. 오히려 SK이노베이션은 태양광사업에서 철수하고, 호주 최대의 석유유통회사인 UP 인수를 포기했다. 전기차 배터리 사업에선 경쟁회사인 LG화학, 삼성SDI를 추격할 동력을 잃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SK의 위기는 한 기업의 위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국내 경제 전반에 부정적 영향을 준다는 점에서 총수 부재 상황이 더욱 안타깝다”고 말했다.

김현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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