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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물 오·남용과 전쟁 치르는 '약 처방의 달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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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숙영 교수가 당뇨병약 오남용으로 인한 저혈당·간질중첩증 환자의 뇌자기공명영상(MRI) 사진을 보면서 약 정리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김수정 기자

의사는 자고로 병을 치료하는 사람이다. 약 처방은 치료의 도구다. 질환이 많은 환자에게는 처방하는 약이 그만큼 많아진다. 노인 환자에겐 특히 그렇다.

두 개 이상의 만성질환이 기본으로 있는 데다 각종 질환에 시달려서다. 그런데 오히려 환자가 복용하는 약을 줄이는 의사가 있다. 분당제생병원(관동대 의대) 신경과 노숙영 교수다. 그는 환자가 복용하고 있는 약을 솎아내 최소한의 약을 복용하도록 정리해 준다. 약 부작용은 줄고, 환자의 복약 순응도(약을 규칙적으로 복용하는 비율)는 높아진다. 결국 좋은 치료 결과로 이어진다. 노 교수가 추구하는 신념이다.

『어린왕자』를 쓴 프랑스 작가 생텍쥐페리는 완벽함에 대해 ‘더 이상 더할 것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더 이상 뺄 것이 없는 상태’라고 정의했다. 때로는 채우는 것보다 덜어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다. 복용하는 약에서도 의미는 크게 다르지 않다. 필요한 최소한의 약만을 처방하고, 필요 이상의 처방약을 걸러내는 것. 환자에게 꼭 필요한 개념이다. 

환자의 약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의사

지난 4월 당뇨병을 앓고 있는 61세 여자 환자가 당뇨약을 투약하던 중 전신 발작을 일으켜 응급실에 실려왔다. 혈당은 23㎎/dL(정상 60~110)으로 낮은 상태였다. 항경련제와 포도당을 주사한 뒤 혈당은 회복됐지만 경련성 발작은 계속됐다. 환자는 3일이 지나서야 서서히 의식을 회복했다. 평소 이곳저곳 병원을 다니며 당뇨약을 투약받은 것이 원인이었다. 환자는 당뇨병 약을 줄이고 난 뒤에야 상태가 조금씩 호전됐다.

 신경과는 뇌전증·뇌졸중을 비롯해 치매 등 퇴행성질환, 떨림·근육경련 등 말초신경병증, 두통을 비롯한 통증 등 다양한 분야를 다룬다. 노인 질환과 연관이 깊어 노인층 환자가 많다. 그런데 노인 환자의 경우 특이한 성향이 있다. 질병에 많이 노출되다 보니 건강에 대한 불안과 걱정이 많다. 노 교수는 “노인들은 병을 진단하고 치료하고 있는데도 더 있을지 모를 병을 찾는 데 몰두하는 경향이 있다”며 “건강에 대한 막연한 불안과 공포가 깔려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렇다 보니 노인 환자는 기본적으로 먹는 약이 많아진다. 몇 개의 대학병원을 돌면서 약 처방을 중복으로 받는 환자도 적지 않다. 여기에 영양제나 진통제, 각종 한약까지 포함하면 한 환자가 먹는 약의 가짓수는 상당하다.

 문제는 몸을 챙기려 먹은 약들이 상호작용으로 각종 부작용을 일으킨다는 점이다. 환자가 간과하게 되는 부분이다. 미국 질병관리본부는 2012년 미국에서 평균 10만 명 정도의 노인이 약 부작용 때문에 응급으로 입원하고, 이 중 절반 이상이 고혈압·당뇨병·뇌졸중 치료제의 오·남용으로 인한 것이라는 보고서를 내놓은 바 있다.

 대표적인 부작용이 경련성 발작과 떨림이다. 물론 제도적으로 함께 복용할 경우 심각한 부작용이 생기는 약 처방을 사전에 차단하는 시스템은 있다. DUR(의약품 처방·조제지원시스템)은 각기 다른 의료기관에서 처방된 약 중 병용 금기 의약품 처방을 걸러낸다.

 노 교수는 DUR에서 걸러지지 않는 부분에 해당하는 약을 줄이고 정리한다. 그는 “환자가 먹는 약물 간 상호작용으로 인한 부작용은 약을 정리해 줄여주기만 해도 증상이 없어지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약 가짓수, 복용 횟수 최대한 줄인다

그렇다고 무조건 약의 수를 줄이는 것은 아니다. 노 교수가 약을 정리하는 방향은 이렇다. 우선 적확한 약물 선택이다. 노 교수는 “개인병원이나 정신과에서 안정제를 마치 항경련 약물로 생각해 처방하기도 한다”며 “이런 경우 항경련제 처방을 받도록 한다”고 말했다.

 남용되고 있는 약은 과감하게 덜어낸다. 두통 환자에게서 많이 나타난다. 만성 두통자는 약국에서 수 개월 동안 진통제를 구입해 먹다가 약이 듣지 않아 진통제 개수가 늘어나고 안정제까지 복용하는 수순을 밟는다. 뇌혈관 CT상으로 이상 소견은 발견되지 않고 진통은 계속된다. 이런 환자에게는 진통제 대신 신경과 가이드라인에 따른 두통 예방약을 처방한다. 처방 변경만으로도 통증의 50%는 호전된다. 의학적으로 두통 정도가 50% 경감되면 치료반응이 있다고 본다.

실제 신경과에서는 장기간 진통제 남용으로 인해 두통이 더 심해지는 ‘약물 과용 두통’이 두통질환의 한 분류로 구분한다.

 당뇨·고혈압·뇌졸중·심장질환에다 알코올 의존성이 높은 60세 이상 경련 환자에 대해서는 만성질환 약의 수를 줄이고 간으로 대사되지 않는 항경련제를 선택한다. 노 교수는 “두세 가지 약 대신 한 가지 약을 선택하면 효과가 훨씬 좋은 경우가 많다”며 “약물을 정리하는 것만으로도 증상이나 상태가 호전된다”고 말했다.

 또 기능이 합쳐진 약을 선택해 가짓수를 줄인다. 노 교수는 “항혈소판제와 혈액순환개선제, 고혈압약과 고지혈증약이 합쳐진 약들로 약을 줄일 수 있다”며 “노인 환자들은 약을 제때 잘못 챙겨 먹는데, 약의 가짓수와 복용 횟수를 줄이면 약 순응도가 높아지고 치료효과가 커지게 된다”고 말했다.

노인 환자 치료 개념은 ‘가족 치료’

노 교수는 노인 환자 치료의 개념을 가족치료라고 말한다. 환자뿐 아니라 환자의 가족과도 소통하는 치료다. 노인 환자는 보통 스스로 몸을 돌보지 못해 가족의 케어가 수반돼야 하기 때문이다. 환자의 증상과 상태에 대해 충분히 듣고, 질환을 이해시킨다. 실제 큰 병원에서 검사·치료를 받고도 정작 집에서 어떻게 환자를 돌봐야 하는지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러한 소통 속에서 적정한 치료 범위를 정할 수 있게 된다. 노 교수가 가족치료를 중시하는 이유는 가족의 이해도가 환자의 삶의 질을 결정짓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그는 “의료진이 환자의 가족과 충분한 소통을 하지 않으면 환자의 가족은 환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게 되고 가족간 다툼이 일어난다”며 “환자는 가족 안에서 짐이 되고 외톨이가 된다”고 말했다.

◆노숙영 교수의 노인 건강관리

① 약은 검사 결과에 따라 선택하라

아프면 막연히 진통제를 먹는 경우가 있다. 게다가 성분이 뚜렷하지 않은 한약을 비롯해 관절에 좋다는 영양제, 뇌기능을 개선한다는 영양제 등을 섞어서 먹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렇게 무분별한 약 복용은 건강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건강을 해칠 수 있다. 검사 결과, 즉 과학적 근거에 따른 약 처방과 복용이 중요하다.

② 약 먹고 배부를 정도면 약 정리 필요하다

노인 환자의 경우 한 번에 10가지 이상을 먹는 경우도 허다하다. 환자 중에는 ‘약 때문에 배가 부르다’고 하는 환자도 있다. 약 때문에 배부르다고 느낄 정도라면 현재 먹고 있는 약 목록에서 필요한 약만을 걸러낼 필요가 있다. 노인성 질환에 따라서는 오히려 약을 끊어서 해결되는 질병도 많다.

③ 정리된 약은 분명히 먹어라

단 정리된 약은 반드시 제때 챙겨 먹어야 한다. 의사들은 신호등 지키듯이 약을 먹으라고 말한다. 약을 정리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정리된 약은 반드시 먹는 것이다.

④ 100가지 약보다 좋은 것이 ‘걷기’다

걷기는 생각하는 것 이상의 효과가 있다. 걷는 것은 한 번에 40분 이상 쉬지 말고, 주 5회 이상 빠른 걸음으로 걸어야 한다. 40분 이상 지나야 걷기의 효과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지방이 분해되기 시작하는 것도 이때부터다. 만성두통에 걷기만 한 것이 없다. 근육운동을 하게 되고 기초대사량이 올라가 수면 유도도 된다. 그뿐 아니라 인지기능이 개선돼 치매 예방에도 효과적이다.

⑤ 주 3회 이상 두통 있다면 검사 받아라

일주일에 3회 이상 일상생활에 지장을 받을 수 있는 정도의 두통을 호소하는 사람을 만성두통자라고 한다. 이런 사람은 검사를 받아 진단을 받는 것이 필요하다. 증상별 히스토리에 따라 검사법은 달라지고, 두통의 타입과 원인을 알 수 있게 된다. 원인 분석을 통한 진단과 치료가 이뤄진다.

⑥ 증상일기 쓰는 것을 귀찮아 하지 마라

만성두통 환자에게는 두통일기를, 경련성 발작이 있는 환자에게는 일지를 써오라고 한다. 환자가 증상이 있었던 날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적는 것이다. 이 증상일기에서 의사가 얻는 정보는 상당하다. 치료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약을 줄이는 데도 큰 도움이 된다. 결국 환자는 보다 최적의 처방을 받을 수 있다. 당연히 귀찮아할 일이 아니다.

류장훈 기자 j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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