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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제자=필자>|이현상|미두취인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인천 취인 소의 설립 이유 서를 보면 하나부터 열까지가 낙후된 조선경제를 부흥시키겠다는 서의 달콤한 조항들로 나열되어 있다.
가령 지역마다 기복이 심한 쌀값을 평준화시키겠다든지, 품질마다 가격차이를 분명히 해서 품질을 개선 또는 규격화시키겠다든지, 인천항의 대일 수출에 활력을 불어넣겠다는 등등….
어쨌든 당시 상거래로는 가장규모가 컸던 미두시장이 일본상인들에게 완전히 독점되어 있었고 여기에 인 취가 문을 열자 그들의 기세는 더욱 등등해졌다.
각지의 주요농산물들이 인천항으로 몰려들었고 인천은 갑자기 구한말 제1의 상도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19l0년 한-일 합병이후 일본인의 이주와 투자가 왕성해지면서 인 취는 총독부 직속으로 들어가 더욱 일본상인의 이익보호에 앞장섰다.
인취는 처음 출발부터 주식회사 형태를 취하고 있었으나 내용적으로는「오오사까」의 「마쓰오」란 일본상인이 절반이 넘는 주식을 차지하고 경영실권을 마음대로 좌지우지하고 있었다.
인취를 통해서 거래되는 쌀은 개소 당시 연간 10만 섬 남짓에 불과하던 것이 1918년에는 3천2백33만 섬에 이르렀다.
앞서 감시 언급했듯이 인취는 지나친 투기 때문에 3·1운동을 전후로 해서 파산위기를 당하기도 했으나 이내 회복되었고 일본경제의 황금기와 더불어 급속한 발전을 계속했다.
1920년께 한때는 쌀값의 폭등으로 하루 거래량이 1백만 섬에 달했고 아무리 못되어야 하루평균 30만 섬이 거래될 정도였다.
불과 1년 전에 1백20만원의 손해를 봤던 인취는 단숨에 이를 만회했다. 오히려 이익이 하도 많이 남아 그해의 주식배당을 60∼75%까지 하고서도 80여만 원의 적립금을 남길 수 있었다.
이처럼 인취가 성시를 이루는 가운데 인천항을 통한 쌀의 대일 수출량은 연간 2백만 섬이 넘었고 가을 추수 때가 되면 부두일대는「쌀의 산」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자연 정미업도 발달했는데 당시 인천에는 30여 개의 정미공장이 들어서 하루 평균 7천 섬의 쌀을 도정해 내고 있었다.
인취를 중심으로 일본상인들이 쌀 시장을 주름잡자 우리나라 미곡상들도 힘을 합쳐 서상빈씨를 대표로 하는 인천신상회사를 조직(l908년)했는데 얼마 있지 않아 객주조합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러나 이 조합은 인천에 모이는 쌀을 업자와 곡주를 대신해서 정미소에 매매 알선을 해주고 구전을 얻어먹는 미미한 단체였을 뿐, 당시 한국쌀의 대일 수출 창구노릇을 하고 있던 인천곡물협회에 비할 바는 못되었다.
여하간 요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돌아간 이후 인천은 마치 가기만 하면 돈을 버는 도시로 소문이 났다.
중동「붐」이 불어닥쳤을 때 너도나도 중동만 가면 떼돈을 버는 것처럼 여겼던 요 몇 해 전의 풍조와 아마도 흡사한 것이었으리라.
증권으로 한몫 잡아 보겠다는 사람들을 선두로 해서 일본말을 좀 할 줄 아는 사람이면 경상도에서까지 이사를 왔고 정미소에서 일하는 직공들, 부두노동자 등등…. 이렇게 사람들이 모여들자 소위「서비스」업이라는 것이 번창해 나갔다고 위로는 고급 요리 집부터 시작해 아래로는 선술집에 이르기까지.
뜨내기나 다름없는 부두노동자들을 상대로 한 대중음식점이 재미를 보았는데, 특히 값이 싼 호프집·선술집·백반 집 등 이 헤아릴 수도 없을 정도로 즐비했다.
한편 증권시장(인취)에서 큰돈을 만지는 일본상인들을 상대로 한 고급 요식업도 인천을 제일로 쳐줬다.
투기가 극에 달했던 미두장은 이미 일확천금을 꿈꾸는 자들의 복마전이나 다름없었고 하루 아침에 울고 웃는 자가 허다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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