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 진짜 돈 된다" 37년 일편단심 돼지아버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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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저 멀리로 치악산이 내다보이는 강원도 원주시 돼지문화원 본관.
②아이들이 돼지문화원의 최고 인기 프로그램인 돼지 경주를 즐기고 있다.
③장성훈 대표가 강원도 양구 생가에서 옮겨다 놓은 ‘약속의 바위’.
그가 어린 시절 바위를 보며 꼭 지키겠다고 약속했던 사항 세 개가 적혀 있다.


21일 오전 11시40분 강원도 원주시 월송리 돼지문화원 앞마당. ‘두그 두그 두그~’ TV 스포츠 중계에서 자주 들었던 효과음이 흘렀다. 출발 선언과 함께 생후 1년 된 돼지 일곱 마리가 튀어 나갔다. 안내요원의 말이 빨라졌다.

 “1번 전광석화가 선두로 나섭니다. 이어 2번 날쌘돌이. 그런데 7번 쭈글이는 뭐 하고 있죠.” 주변에 있던 아이들 20여 명이 소리를 지른다. “빨리 뛰어! 뭐 하는 거야.”

 돼지들은 달리고, 달렸다. 연못을 돌고, 돌계단을 오르고, 마지막으로 미끄럼틀을 내려오고, 80m 남짓 코스를 완주하는 데 50여 초 걸렸다. 꼬마들이 경주를 마친 돼지들에게 과자를 주며 환호를 멈추지 않았다.

 돼지문화원에서 하루 네 차례 볼 수 있는 풍경이다. 돼지문화원? 생소하다. 돼지에 웬 문화까지? 그런데 이곳은 특이하다. 국내 유일의 축산 테마파크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돼지 이야기’를 표방하며 2011년 12월 문을 열었다. 부지 8260㎡(약 2500평)에 ‘돼지의 모든 것’을 모았다. 종돈·양돈(1차산업), 정육·육가공(2차산업), 관광·체험(3차산업)을 결합한 이른바 ‘6차산업’의 전초기지로 커가고 있다. 우리 농촌의 새 모델을 만들어보려는 장성훈(53) 대표의 30여 년 집념이 담겨 있다. 사람을 알려면 먼저 손을 보라고 했나. 그의 열 손가락 끝은 모두 부르터 있었다.

 - 손가락 하나 성한 게 없다.

 “농부들도 다 그렇지 않나. 하루 종일 일하면 그렇게 된다. 돼지문화원 건립 문제로 더 바빴을까. 3년 전부터 상태가 심해졌다. 약값만 200만원 들었으나 잘 낫지 않는다. 누가 보면 주부습진에 걸린 줄로 안다.”

 - 갤러리·카페부터 펜션·노래방까지 완비했다.

 “축산의 새 지평을 열어보려고 한다. 그냥 돼지만 키워선 우리 농축산업의 앞날을 기약할 수 없다. 양돈산업은 특히 그렇다. 그때그때 부침이 심하다. 좋을 때, 나쁠 때가 극명하다. 주식투자와 같다. 언제까지 운에 몸을 맡길 수는 없지 않나.”

 - 투자금이 만만치 않았을 텐데.

 “지금까지 대략 80억~90억원 든 것 같다. 문화원 건립에만 40억원이 소요됐다. 지난 2년 동안 적자가 컸으나 지난달부터 수지를 맞추기 시작했다. 나름 알려졌는지 주말에는 사람들로 꽉 찬다. 올해 3만여 명이 찾을 것으로 예상한다.”

 - 만만찮은 액수다. 원래 돈이 많았나.

 “아니다. 무(無)에서 시작했다. 고향이 강원도 양구 산골이다. 집안이 어려워 중학교도 가지 못했다. 검정고시로 대관령축산고에 들어가면서 돼지와 연을 맺었다. 37년째다. 대학(강원대 축산과)도 독서실 청소, 나이트클럽 조명기사 등을 하며 마칠 수 있었다. 국내 유수의 종돈회사에 10년 가까이 다녔고, 1997년 처음으로 내 농장을 갖게 됐다. 일편단심 돼지만 보고 살아왔다. ‘나 오직 그대를 사랑해~’로 시작하는 최진희의 노래 ‘그대는 나의 인생’이 있다. 내게 ‘그대’는 돼지다.”

 - 그래도 웬만한 중소기업 규모다.

 “우여곡절이 많았다. 처음 사업에 뛰어들 무렵 손위 처남이 2억원을 빌려주었다. 돼지 100마리로 시작했다. 그런데 바로 IMF 외환위기가 터졌다. 사료값이 급등하고, 돼지값은 폭락했다. 친척·선후배들 도움으로 일어설 수 있었다. 그간 쌓은 노하우를 살리고, 운도 따라 2만5000마리까지 늘릴 수 있었다. 그러고는 2011년 초 구제역 폭탄을 맞았다. 2만2000마리를 땅에 묻을 수밖에 없었다.”

 - 죽고 싶은 심정이었겠다.

 “그간 터득한 긍정주의랄까, 엎어진 물을 다시 주워 담을 수는 없지 않나. 보상금 100억원으로 빚을 갚고, 남은 금액 대부분을 돼지문화원에 쏟아 부었다. 다들 미친 짓이라고 했다. 정신 나간 놈이라는 비아냥도 들었다.”

 - 보상금으로 편하게 살 수 있지 않나.

 “빌 게이츠가 세계 최고 갑부라고 일을 놓은 건 아니지 않는가. 내 분야에서만큼은 남이 가지 않은 길을 닦아보자고 마음먹었다. 빈손으로 시작했으니 더 이상 떨어질 곳도 없었다. 내 전문성을 살려 위기를 기회로 돌리려 했다. 돈(豚)이 돈이 되는 성공모델을 보여주고 다른 농축산인에게도 희망이 되고 싶었다.”

 - 결단력이 대단한 것 같다.

 “그간 돈사(豚舍)에 화재가 세 번 났었다. 폭설로 돈사가 무너져 수백 마리를 잃은 적도 있다. 그때마다 오기가 생겼다. 주저앉을 수 없었다. 보험금을 타서 돈사를 더 크게 지었다. 돼지 외길을 걸어온 이의 자존심이었다.”

 장 대표는 왼손 엄지와 검지 손가락 끝마디가 없다. 어린 시절 고향 양구에서 수류탄 뇌관을 갖고 놀다 입은 부상 때문이다. 그는 “라디오 등을 분해·조립하는 것을 좋아해 손이 온전했다면 공학도가 됐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 입지전적 인물이라고 해도 될까.

 “아니다. 앞으로 할 일이 더 많다. 우리 마을 전체를 6차산업의 중심지로 만들고 싶다. 여러 구상을 하고 있다. 문화원 밑에 있는 폐교를 귀농을 꿈꾸는 사람들의 교육장으로 꾸밀 계획이다. 원주에 있는 상지대·한라대와 제휴를 맺어 관광·의료단지를 조성하는 안(案)도 구체화했다.”

 - 포부가 원대하다. 실현성이 있을까.

 “20년 전만 해도 오늘의 나를 상상할 수 없었다. 단순히 돈을 벌려고 하는 게 아니다. 숱한 실패 속에서 지금까지 왔다. 우리 농촌에도 새로운 패러다임이 자리 잡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겠다. 일본에서는 이미 입증된 모델이다. 현재 문화원을 비롯해 종돈회사·유전자회사 등 5개 업체를 운영하고 있다. 지난해 총 매출은 1, 2, 3차 합쳐 110억원이었다. 머지않은 미래에 8000억원대로 키우려 한다.”

 - 사람들은 돼지를 ‘더럽다’고 하는데.

 “편견이다. 돼지는 똥자리·잠자리를 가린다. 여기저기 싸고 다니지 않는다. 배가 터지도록 먹지도 않는다. 서열이 엄격해 어미 젖을 먹을 때도 각자 자리가 정해져 있다. 번식생리가 정확하고 주기적이라 신사적인 동물에 가깝다.”

 - 돼지 예찬론인가. 돼지도 문화로 성공하려면 스토리가 중요하다. 그게 부가가치다.

 “한때 1사1촌 운동이 주목을 끌었다. 하지만 얘기가 없어 두 번 찾아오는 사람이 드물었다. 갤러리를 꾸미고, 돼지 경주를 벌이고, 소시지·피자 만들기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앞뒤 동산에 산책로를 조성하고, 가족 숙박시설을 지은 것 모두 ‘맛있고, 멋있고, 신나는’ 돼지문화를 만들기 위해서다.”

 - 돼지가 평생의 동반자다. 한마디 한다면.

 “고맙고도 미안할 뿐이다. 무일푼이었던 내게 돈을 갖다 줘서 고맙고, 또 그런 돼지를 잡아먹어야 한다는 게 미안하고…. 지난 구제역 사태 때 살처분된 돼지들을 기억하는 작은 돌탑을 문화원 뒷동산에 만들었다. 지금도 거의 매일 그곳을 찾는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걸 주고 가는 돼지에게 내가 잘해야만 하는 이유다.”

글=박정호 문화·스포츠·섹션 에디터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S BOX] 두께 7㎜ 삼겹살, 230도 불판에 구워야 제맛

장성훈 대표는 자칭 ‘돼지아버지’다. “돼지에 관한 한 산전수전·공중전을 다 겪었다”고 자부한다. 한국인의 3대 먹거리로 ‘밥, 김치, 돼지’를 서슴없이 꼽는 그다. 그에게 물었다. 돼지고기를 맛있게 먹는 법이 있나. 장 대표는 모두 10가지를 꼽았다. 돼지문화원 식당 식탁 깔개에도 인쇄된 문구다. 그중 5개를 추렸다.

 ① 삼겹살 7㎜, 목심살 10㎜=고기는 냉장육을 고른다. 도톰하게 썰어야 맛이 살아난다. 너무 얇으면 육즙이 빠져나가 고유의 맛을 느낄 수 없다. 숯불에 구울 경우 조금 더 두꺼워도 좋다.

 ② 섭씨 230도=불판이 뜨거워졌을 때 고기를 올린다. 불판에 손을 가까이 댔을 때 뜨겁다고 느껴질 때가 적당하다. 섭씨 230도 안팎이다. 그래야 고기가 들러붙지 않고 맛있게 구워진다.

 ③ 맨 소금 = 소금에 찍어 먹어야 제맛을 느낄 수 있다. 등급이 높은 고기는 그 자체로 즐기는 게 좋다. 기름장은 피하는 게 낫다. 쌈장도 쌈채소에만 넣고 고기에는 묻히지 않는 게 좋다.

 ④ 한 번만 뒤집기=소고기와 마찬가지로 돼지고기를 구울 때도 한 번만 뒤집는 걸 추천한다. 여러 번 뒤집으면 육즙이 말라버릴 수가 있다. 같은 이유로 여러 사람보다 한 사람이 굽는 게 낫다.

 ⑤ 고기보다 사람=돼지고기와 찰떡궁합은 김치다. 하지만 맛이 있으면 무슨 소용인가. 음식은 무엇보다 좋은 사람과 함께해야 한다. 체면 차리지 않고 허겁지겁 먹을 수 있는 사이는 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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