덩샤오핑 업고 '카리스마 쌓기' 나선 시진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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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의 덩샤오핑(鄧小平)은 사후에 동상을 세우지 말라는 말을 남겼다.

그는 마오쩌둥(毛澤東) 1인 우상화의 폐단을 바로 곁에서 지켜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덩이 만든 도시인 광둥성 선전(深 土+川) 시민들은 덩의 유언을 어기는 ‘불충’을 범하고 말았다. 선전 중심부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롄화산(蓮花山) 꼭대기에 전국 최초의 덩샤오핑 동상을 2000년에 세운 것이다. 이곳에서 만난 20대 남성 류웨이두는 “한적한 어촌 마을 선전을 홍콩 못잖은 일류 도시로 만든 덩샤오핑에 대한 감사와 존경심을 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던 까닭”이라고 말했다.

덩의 탄생 110주년을 하루 앞둔 21일, 롄화산 공원은 이른 아침부터 하루 종일 참배객으로 북적였다. 멀리서 일부러 찾아온 사람들도 많았다. 장쑤성에서 일가족을 데리고 찾아온 스비커(史必科ㆍ68)는 “중국을 가난에서 벗어나게 해 준 덩샤오핑 동지야말로 위인”이라고 추켜세웠다. 단체 방문객도 눈에 띄었다. 한 20대 여성은 “화장품 업체에서 직원 연수 여행을 왔는데 첫 방문지로 덩샤오핑의 동상을 택했다”고 말했다. 공원관리처 주임은 “덩의 탄생일인 22일에는 2008년 쓰촨 대지진 때 부모를 잃은 학생 40명이 봉사단체 회원들과 함께 찾아와 헌화하는 등 각종 단체ㆍ기관들의 참배가 예정되어 있다”고 말했다.

동상에서 100여m 떨어진 곳에 있는 평범한 나무 한 그루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는 시민들이 눈에 띄었다. 다가가보니 2012년 시진핑(習近平) 당시 총서기가 기념식수를 했다는 표지석이 있다. 2012년 18차 당대회에서 대권을 잡은 그는 첫 방문지로 선전을 택했다. 한 관리원은 “가오산룽(高山榕)이란 이 나무는 1992년 그 유명한 남순강화 당시 선전을 방문한 덩샤오핑이 심은 것과 같은 수종”이라 설명했다. 시진핑이야말로 덩샤오핑의 개혁 노선을 따르고 실천하는 정통 후계자임을 은연중에 강조하는 상징물인 셈이다. 20일자 인민일보를 비롯한 중국의 유력지들에 일제히 실린, 덩샤오핑의 행적을 따라 취재한 장문의 르포 기사 첫 문장도 바로 이 나무에 얽힌 사연이었다.

선전은 시 주석에게도 각별한 의미가 있는 곳이다. 1977년 세 번째 실각에서 복권된 덩샤오핑에게 선전 특구 개발을 건의한 당시 광둥성 서기 시중쉰(習仲勳)이 시 주석의 부친이기 때문이다. 그는 중국 젊은이들이 선전에 몰려들어 홍콩으로 밀입국하는 상황을 가감 없이 덩샤오핑에게 보고했다.

시 주석 역시 덩샤오핑의 추종자임을 분명히 했다. 그는 20일 베이징에서 덩샤오핑에 관한 좌담회를 열고 “덩샤오핑은 문화대혁명의 잘못된 이념과 실천을 철저하게 부정했고, 마오쩌둥의 잘못된 사조를 철저히 비판했다”고 말했다. 마오의 길이 아니라 덩샤오핑의 노선을 따를 것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또한 중국 최고지도자의 입에서 ‘마오쩌둥의 잘못’이란 직설적 표현이 나온 건 의미심장한 일이다. 덩샤오핑 조차 마오에 대해선 “공이 과를 덮는다”고 표현하는 데 그쳤다. 덩샤오핑 기념 행사의 열기와 규모는 지난해 마오의 탄생 120주년 기념행사와도 대비된다. 당시 시 주석이 지나치게 성대한 기념행사를 자제하라고 지시함에 따라 대형 음악회 등 일부 행사가 취소됐다. 하지만 올해는 덩샤오핑의 일대기를 그린 48부작 대하드라마를 국영 CCTV가 방영하는 등 정부가 앞장서서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있다.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는 “시 주석은 덩샤오핑처럼 중국을 새로운 개혁과 성장의 시대로 이끈 지도자로 평가되길 원한다”고 보도했다. 시 주석이 내세운 정치 슬로건 또한 ‘전면적인 개혁의 심화’다. 덩샤오핑의 개혁을 업그레이드시킨 ‘개혁 2.0’이라 부를 만하다. 그는 자신의 목표 달성을 위해 덩샤오핑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반부패 캠페인 등으로 권력기반 굳히기에는 성공했지만, 아직은 부족한 대중적 카리스마를 덩샤오핑의 권위를 빌어 보충하고 있는 셈이다. 개혁개방의 1번지이자 덩샤오핑의 도시인 선전에 심어진 나무 한 그루가 이를 말해 준다.

선전=예영준 특파원 yyjun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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