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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44)<제72화>비 규격의 떠돌이 인생(42)「몽타지」추도시|김소운(제자=필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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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세 권 동화집 중 두 권은 순수한 전승동화요. 한 권은 역대의 인물들-맹사성이니 이항복이니 고산자 같은 분들의 사적을 동화체로 고쳐 쓴 것이다. 사화 두 권은, 삼국시대와 여·이조의 역사의 줄거리-, 유왕의 복위를 꾀하다가 형사 한 성삼문 들의 충절의 기록「단종육신」은 내 글을 내가 쓰면서 몇 번이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역시 집 두 권은 전저『젖빛 구름』(하출서방)을 보충해서 처음엔 세 권(전·중·후)에 나누기로 예정했었으나『시국 색이 없다』는 이유로 총독부 동경출장소의 원고검열에서 기각된 것을 그 시국 색은 셋째 권 후기에 있노라고 핑계를 대고 간신히 전기·중기 두 권이 햇빛을 보게 되었다. 후기는 낼 생각을 아예 포기했다.
그 당시에 빈 저역서들은 예외 없이 서문에 시국 색이 풍겨져있다. 서문 맨 마지막에 내 이름을 쓸 때「싱가포르 입성의 날」이니, 혹은「등화관제하의 망여산방에서」니 하는 식의 치레문자가 으레 한마디씩 들어간다. 본문을 다치지 않고 책을 낼 수 있는, 이것이 최소한도의 방편이요 혈로다.
「싱가포르 입성의 날」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날자 라도 이렇게 한마디 적어야 「불급불요」라는 관문을 간신히 통과할 수 있다. 「망여산방」은 고국을 바라다본다는 뜻으로, 나무에 새겨 현관에 걸어 두었던 그 시절의 내 집 재호이다. 밤이면 으레 등화관제이니 일부러 그런 문자를 내걸 필요는 없는데도 이 한마디로 출판협회가 눈을 감고 용지가 배급되어 나온다.
서문의 내용에도 결코 시국을 망각한 것이 아니라는 흔적을 담아야 안다. 그러기가 싫으면 출판을 단념할 밖에 없다. 어느 쪽을 택할 것이냐?
어린이 잡지 때「사과 한쪽(한글)」을 주려면 「도토리(일어)」를 끼워야 하던 그 교환조건이 여기서도 길을 가로막는다.
『그 노릇을 하지 않고 책을 단념하느냐?』『도토리를 끼워서라도 사과를 주느냐?』-, 이럴 경우 나는 언제나 후자를 택했다. 내 처세법에는「합리」가 없다. 어느 모로 따져도 둥글게 원만하게 살아오지는 못했다. 그런 내가 이자택일의 교환조건 앞에서만은 언제나 길을 비켜서 양보했다. 옳은 일인지, 그릇된 노릇인지 그 손익계산을 따져 본 적은 없었다. 때로는 귀 밖으로 군소리들이 들려 오기도 하나, 나는 그 일을 두고 변명한 적도, 뉘우쳐 본 적도 없었다.
「야마모또 어소로꾸」 원수의 단장이 거행된다는 날이다. 신문 제1면에 커다랗게 실린 기사를 펴들고 막 아침상 머리에 앉으려는데 지급 전보 한 장이 날아 왔다. 발신인은 매일신보 동경지사장인 이정순-. 급히 만나고 싶으니 동경으로 나와달라는 전문이다. 무슨 일일까?
이정순과는 그가 서울서 잡지 「중앙」의 편집기자로 있을 때부터 서로 친하던 사이다. 배제출신의 「스포츠맨」으로 명랑 쾌활한 애처가요, 건실한 가정인 이었다.
아울러 극성맞은 「황국신민」이기도 했다.(집안에서도 아이들에게 그는 일본말을 시켰다)
그러나 인덕이라고나 할까? 그런 이유로 해서 그를 미워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이정순 은 누구에게도 친근감을 갖게 하는 호한이었다. 이유를 모른 채 동경으로 나갔다.
「니시긴자」의 해신지사에 들어서자 이정순은 반갑게 맞으면서 나를 부른 것은 산본 원수의 국장에 추도 시를 써 달라는 청탁 때문이라고 했다.
두 시간 후면 서울 본사로 전송해야한다는 화급한 분부이다.
입맛 쓴 노릇이기는 하나 친한 친구의 직업의식에서 나온 간청을 물리칠 도리는 없었다.
매신지사에서 국장이 거행되고 있는 일비속 공원까지는 걸어서도 10분이 채 못 걸린다. 그러나 나는 거기로 가지 않고 전차로「나까노」로 직항했다. 거기 「타지찬」(뒷날 내가 하숙인으로 장기체제한) 라는 단골여관이 있다.
그날의 일본신문에는 국장에 붙이는 추도시 들이 여기저기 실려 있었다.
여기서 한 줄, 저기서 한 줄,「몽타지」사진을 만들듯이 추려 모아서 시 같은 것을 하나 만들어 전화로 이정순에게 보냈다.
명색 내 이름으로 실려지는 글을 이런 식으로「제조」한 것도 내 일생을 두고 두 번 없었던 일이다. 이밖에 시국적인 글이나 시를 쓴 일은 한번도 없었다.
40년 가까이나 지난 요즘에 와서도 내 이름으로 실려진 이 추도 시를 두고 군소리가 있다는 얘기다. 이 한편의 추도 시로 해서 후세에 내 이름이 남을지도 모른다니 황감한 노릇이다.
그럴 줄 알았더면 이런 시나 글을 열 편, 스무 편 더 써낼 것을! 일본글로 20권의 저서를 가진 내게 어찌 그럴 기회가 남만큼 없었으랴마는-.
그러나 돌이켜 생각하면 그 시기에 내가 고국에 살고 있지 않았다는 것-, 그것이 시국의 거센 파도를 막아준 하나의 방파제가 된 것도 사실이다. 만일에 내 나라에 머물러 있었던들「몽타지」한 추도시 한편 정도로는 끝이 나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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