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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국내 유일"…그만둘 자유도 없어|영화특수효과 「맨」 이문걸씨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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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멀쩡한 날씨에 비나 눈이 내리게 할 수도 있다. 바람은 물론 번개를 치게 할 수도 있다. 밤하늘에 추억 같은 선을 그리면서 앞산 계곡으로 빠지는 유성도 만들고, 구태여 우주공간이 아니더라도 사람을 하늘로 날아다니게도 하며 한강철교쯤은 실제로 다리를 조금도 다치지 않고 폭파할 수도 있다.
이문걸씨(46·서울 성동구 성수2가 2동36) .
그는 이 나라 영화계에 있는 단 한 사람의 특수효과「맨」이다.
비오듯 총탄이 퍼부어지면서 폭탄이 터지고 총탄을 맞은 연기자가 가슴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질 경우 그런 상황이 실감 있게 보이지 않으면 안되고 그러면서도 연기자들이 털끝 하나라도 다쳐서는 안 된다. 이씨는 바로 이런 「보이는 장면」을 실감 있게 만들어 내면서 평생을 영화계에 바치고 있는 뒤안길 인생이다.
특수효과라고는 엄두도 못 내던 시절에 맨손으로 덤벼 불모지대를 개간해오면서 그는 육신의 일부인 손가락이 잘려나가는 시련을 겪어야했고 그 자신의 말로는 가족까지 잃는 고통을 맛봐야 했다.
집념과 고통. 이씨는 자기 일생이 그것의 연속이었다고 말했다.
25세 때인 1960년 봄, 한흥 영화사에 취직이 되면서 이씨는 영화와 처음으로 인연을 맺었다. 처음 맡은 일은 소품담당이었으나 당시 사장 최관두씨가 유달리 「액션」영화를 즐겨만드는 바람에 이씨에게 특수효과의 기회가 쉽게 왔다.
『취미나 소질이 있었던가봐요. 자꾸 그 쪽에 관심이 갔거든요.』그 무렵 특수효과는 군이나 경찰의 지원 없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50년대 만해도 실탄이 연기자 주변 땅바닥에 맞는 효과를 내기 위해 군이나 경찰의 명사수를 데려다 실제로 실탄사격을 해댄 「전시시대」였다.
대관령에서 첫 촬영을 했다. 영화 『두만강아 잘 있거라』. 독립투사 2명이 일본군 1개 중대의 공격을 받는 장면이었다.
마분지를 3cm길이에 연필 굵기로 말아서 그 속에 특수약품을 넣어 가짜 실탄을 만들었다. 그렇게 1백개 쯤을 만들어 한 개 한 개마다 특수전선을 연결한 뒤 2cm깊이의 땅속에 일정한 간격으로 묻고 선에 전기가 흐르도록 합선·폭발시키면 흙이 튀면서 실탄이 맞는 효과를 냈다.
불편하기 그지없었으나 그때는 대단한 발명이라도 해 낸 것처럼 제작진이 흥분했다고 이씨는 회고한다.
약품을 더 많이 넣으면 수류탄 폭발효과도 낼 수 있었다. 이때 흙은 무거워 높이 튀어 올라가지 않기 때문에 시각적 효과를 감안해 가벼운 「시멘트」·석탄가루·톱밥 따위를 흙 대신 덮어쓴다. 그 위에 「코르크」덩어리를 몇 개 올려놓으면 돌멩이가 튀어 오르는 효과까지 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이 길을 평생 걸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불운한 처지에 빠지면 오기와 집념이 생긴다든가. 이씨는 작업 중 손가락이 잘려나가는 불운을 겪은 뒤 오히려 특수효과를 「업」으로 삼겠노라고 결심한다.
62년 가을 서울 관악산. 『창살 없는 감옥』을 촬영하면서 이씨는 왼쪽 손 집게손가락 한마디를 잃었다.
불편한 「마분지 질탄」대신 공업용 뇌관을 쓰면서 착오가 생겼다.
연기자의 실수로 한번 NG가 난 뒤 재 촬영에 합선시켜놓은 전선을 분리시키지 않은 채 새로 묻을 공업용 뇌관을 전선에 연결하는 바람에 폭발사고가 난 것. 『육신의 일부가 잘려나간 것도 아픔이었지만 내 자신의 실수가 더 큰 아픔이었죠.』
더 잘해보리라는 집념이 생긴 것도 그때부터였다.
그래서 영화사를 떠나 독립된 살림을 차리고 조수 5명과 함께 본격적인 특수효과를 시작한게 64년.
우선 불편한 「마분지 실탄」이나 위험한 공업용 뇌관 대신 편리하고 안전한 「가짜실탄」을 개발했고 실탄과 이어진 선 하나 하나를 손으로 합선시켜 주는 불편한 폭발방법을 고치기 위해 「스위치」하나만 누르면 수백 발의 실탄을 일정한 시간간격으로 자동 폭발시킬 수 있는 전자식 「컨트롤·박스」도 만들어 냈다.
철사에·모형 비행기를 매말아 움직이도록 하는 공중전 장면도 해냈고 특수전선을 늘여놓고 순간적으로 전류를 흐르게 하는 「가짜번개」며 암흑 속에서 특수 전구를 움직여주는「가짜유성」, 그리고 다리폭파 장면도 이제는 거뜬히 해낸다.
특히 이 「다리폭파」는 이씨가 가장 노련한 솜씨를 보이는 대목이다.
『같은 양의 특수약품 1g이라도 방향·습도·위치에 마라 위력이 다르고 화면도 달라지죠.』 물론 실물모형의 폭파다.
『오! 인천』때는 미국인 특수효과「맨」이 와서 다리폭파 장면을 촬영했으나 「테렌스· 영」감독이 계씨의 솜씨를 알고는 다시 이씨에게 맡겨 재 촬영을 했을 정도.
이런 집념의 열매로 이씨는 77년 대종상까지 받았다.
그러나 그해 77년은 이씨에게 잊을 수 없는 해다.
폭발효과는 밤「신」이 더 좋기 때문에 야간촬영이 많게 마련. 그해 8월 아내와 어린 3남매를 잃은 것도 바로 그 야간 촬영 때문에 자신이 집을 비웠던 밤이었다.
인현동의 2층 샛집. 새벽 2시쯤 아래층에서 불이 났고 2층으로 올라오는 불길 속에서 아내는 아들과 두 딸을 한꺼번에 데리고 피신하려다 힘에 벅찬 나머지 쓰러져버렸다.
그 고통을 못 이겨 한달 남짓 절에 파묻혔으나 필경 동료들에게 덜미를 잡혀 촬영장으로 다시 끌려 나올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꼭 「필요한 사람」이라는 사명감도 있었지만 고락을 함께 해 온 조수 5명의 생계까지 이씨는 책임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에게는 그때는 물론 지금까지도 일이 있건 없건 고정 월급을 주고 있으니까.
이제는 일을 그만 둘 수도 없다. 또 그만두고 싶지도 않다. 오히려 외국에라도 나가 새로운 기법을 배워 더 완벽하고 실감나는 특수효과를 하고 싶을 뿐이다. 그렇다고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아니다.
효과료를 정해놓고 받는 건 아니지만 다리하나 폭파하는데 30만원쯤. 물론 폭파될 때 기우둥 하면서 무너진다든지 특수한 모양의 다리라면 50만원까지도 받지만 최근엔 일이 거의 없다. 가끔 있는 TV일이나 『배달의 기수』가 고작이다. 그러나 이씨는 그럴수록 오히려 더 의욕에 불탄다. 「007」이나 「스타워즈」같은 특수효과를 자기 손으로 해보고 싶어한다. 그래서 이씨는 오늘도 뚝섬에 있는 그의 실험실에서 새로운 기법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오홍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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