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27)<제72화>비현실의 떠돌이 인생<제자=필자>(24)김소운|구전민화를 찾아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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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그해 정월 초하루, 시대일보 문예난에 포석은 전면4, 5단의 긴시평을 쓰면서 맨 끝에 역시 시대일보에 실렸던 내 서타시 하나를 들어서「베를렌」이 부럽지 않다고 극구 찬양해 주었다. 그런 시편들을 모아『출범』이란 첫 시집 하나를 부산에서 내었을 때 포석은 거기다 50∼60행의. 긴 서시를 붙여주었다.
『바다와 푸른 하늘, 흙과 햇빛』이런 서두로 시각 된 그 시의 중간 중간에는『사람을 나누고 싶구나! 목숨을 같이 누리고싶구나!』『굴레 벗은 말같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그 자유를 만나기 위해서, 그 사람을 다시 찾기 위해서-』그런 시구들이 있었다. 포석의 냉엄하게 보이는 표정과는 딴판으로, 인간에 대한 끓어오르는 사랑. 복받치는 자유에의 갈망이 내게 주는 서시를 빙자해서 거기 약동하고 분출한 느낌이었다.
부산에서 작별한지 얼마 안되어 포석이 종적을 감추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처자를 버리고-, 자유 없는 고토를 버리고-.
포석이 간 곳을 나는 모른다. 땅 끝인지- 저 하늘 구름 속인지-.
그후 5, 6년 지나「버스」차장 노릇을 한다는 포석의 딸과 가난에 찌든 그의 부인을 서울에서 한번 만난 적이 있다. 그런지도 벌써 45∼46년-, 중남 이란 사내 이름 같은 그 딸이 어디서 살고 있다더라도 벌써60대의 할머니다.
포석이 서시를 붙여 춘『출범』속표지에 그림을 그려 준 이는 당시 여류화가로 영명이 자자하던 나혜석 여사였다.
초량 경남인쇄에서 5백부를 찍은 것 시집『출범』은 겨우 10여부가 내 손에 들어왔을 뿐, 나머지는 인쇄비 미블로 인쇄소 창고에서 그냥 유산되고 말았다.
부산 살이는 그다지 길지 않았다. 나는 다시 동경으로 갔다.
현해탄을 건너가기는 이것이 두 번째다. 그러나 동경에는 나를 기다리는 누구 하나 있을 리 없다.
육체는 육체로 기르고 정신은 정신으로 다스린다- 이것이 이른바 내「양권 분립」설이다. 왕후장상이나 날품팔이 노무자나 하루세끼 먹기는 일반이다. 먹기 위해서는 육체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이면 무엇이건 한다-. 그렇게 마음은 정했지만 말처럼 쉽지 않았다. 간판 집 조수노릇, 월부가게의 광고지 돌리기-, 육체노동은 어림없는 노릇이고 보니 과히 힘을 쓰지 않아도 되는 그런 일밖에는 할 일이 없었다.
『지상낙원』이란 시 잡지를 주재하는「시라또리·쇼오고」(백조생오)씨를 만나게 된 것은 어떤 기연에서였는지 기억에 없다. 『지상낙원』의 동인의 하나가 길잡이 노릇을 한 것이 아닐까.
소위 민중파 라고 불리던 시인들-, 「도미따·사이까」 (부전쇄화) 「후꾸나·마사오」 (복전정부)「모모따·소오지」 (백전종치),- 그런 이름에 백조생오씨로 한몫 끼여 있었다. 그들은「휘트먼」「카핀터」를 숭상하는 민주주의 시인들이었다. 특히 백조씨가 주재하는 『지상낙원』은 농민문학에 주력을 기울였다.
1926년은 대정기의 최종 년이다. 그해 겨울 『지상낙원』에 내가 기고한 『조선의 농민가요』가 이듬해 1927년(소화2년)정월 호부터 실리기 시작했다.
2월 호의 편집후기에는『조선의 농민가요는 만나는 사람마다 임을 모아 칭송했다』고 백조씨가 쓰고 있었다. 처음 쓰는 연재 원고라 그토록 호평이었다는 말에 동경 온 보람 같은 것을 느끼기도 했다.
구전민요를 찾아서 동포 노무자들이 모여 사는 동리를 찾아 다녔다. 비나 눈이 오는 날은 일을 쥐기에 그런 노무자들을 만나기가 쉽다. 그러나 겨우 스무 나믄 살 남짓한 새파란 나이로 억센 일꾼들을 만나 구전민요를 채집한다는 것은 생각처럼 그다지 쉬운 노릇은 아니었다.
구전민요란 것을 이해시키기에도 힘이 들었다. 이 사람들은 노래라면 「앙산도」「성주풀이」「새타령」「망아타령」-아니면「수심가」「영변가」나 아주 점잖을 뺀 시조 흉내 같은, 구전민요와는 좀 촌수가 먼 노래들이다.
그런 노래도 쉽게는 나오지 않는다. 소줏 병이나 막걸릿 병(일본에도 막걸리는 있다)을 들고 찾아다니면서 두 번 세 번 낯이 익어야 겨우 나온다.
『할머니들이 부르던 베틀노래나 모심기 때 김맬 때 부르던 노래-,그런 노래는 모릅니까?』
내가 하는 말에 처음에는 당치도 않다는 표정들을 한다.『점잖지 못하게 시리…남 비록 일본까지 건너 와서 막노동을 할망정 남아 대장부가 그런 쌍 노래를 어찌 입에 담을까보냐…, 그런 체통과 염치 때문이다.
구전민요로는 볼 수 없는 그런「점잖은 노래」둘도 듣는 체하고「노트」에 적는 체 해야한다. 그런 밑천이 다 나온 뒤에야 그들이 말하는「장노래」가 하나씩 둘씩 나오기 시작한다.
어떤 때는 겨우 5∼6수, 운수 좋은 날은 30∼40수나 채집할 때도 있었다. 그런 날은 무슨 휭재나 한 것처럼 돌아오는 발걸음도 한결 가벼웠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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