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맨해튼 독립운동 유적지 가다

미주중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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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해튼 중심가인 타임스퀘어 인근 43스트릿과 브로드웨이 교차로 부근에 있는 더 타운홀(The town hall). 성조기가 게양된 붉은 벽돌 건물인 이곳에서는 3·1운동 2년 후인 1921년 고 서재필 박사 등의 주도로 한인과 타민족 13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기념식이 열렸다.
맨해튼 23스트릿과 5애브뉴가 만나는 곳에 서 있는 구 5번가 호텔. 1883년 조선왕조 견미사절단이 미국 대통령을 접견해 자주독립국을 천명한 이 건물은 관광명소로 유명한 플랫아이언 건물 맞은 편에 자리해 있다.
맨해튼 한인타운 인근인 34스트릿 6애브뉴에 있는 구 맥알핀 호텔. 현재 주상복합 건물로 쓰이고 있는 이 건물에서는 1918년 소약속국동맹회가 열려 3.1운동 촉발의 계기가 됐다.
컬럼비아대 인근의 인터내셔널하우스. 1920년대 후반 북미대한인유학생총회 동부대회가 열린 곳으로 당시 한인 유학생도 다수 살고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대한독립 만세! 만세! 만세!”

1921년 3월 2일 맨해튼 중심가에 있는 ‘더 타운홀(The town hall)’에서는 조선의 독립을 기원하는 만세삼창이 울려 퍼졌다. 1919년 3·1운동 이후 2년이 지난 이날 무려 13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한인연합대회’가 맨해튼 심장부에서 열린 것.

뉴욕 일원에 살고 있는 100여 명의 한인 뿐만 아니라 조선의 독립 열망을 도우려는 미국인들까지 함께한 이곳은 미주한인 독립운동사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유적지다. 하지만 이곳이 독립운동 유적지임을 아는 한인은 그리 많지 않다.

특히 이곳은 한인들이 즐겨찾는 명소인 42스트릿 타임스스퀘어에서 불과 1블록 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거의 없을 정도. 뉴욕시 곳곳에는 역사 깊은 독립운동 유적지가 자리해 있지만 한인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93년 전 맨해튼 타운홀에서 열린 이 행사는 미주 한인사회뿐만 아니라 전 세계 한인사회 독립운동 관련 옥내집회로는 최대 규모로 알려져 있다. 이 행사를 주도한 고 서재필 박사는 “1919년 민중봉기를 통해 변화를 절실히 깨달았다. 조선인들은 빛을 보았기 때문에 어둠 속으로 되돌아가지 않을 것을 확신한다”고 강조했다.

한인연합대회가 열리기 직전인 1921년 1월 12일 개관한 타운홀은 중요 이슈들을 대중에게 교육시키기 위한 집회 장소로 건립됐다. 이후 토론 장소이자 뉴욕시민을 위한 각종 문화공연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현재에도 개관 당시의 원형이 잘 보존돼 있는 타운홀은 2012년 국립역사유적지로 지정될 만큼 뉴욕에서도 중요 문화유산으로 대우받고 있다.

제69회 광복절 이틀 앞둔 13일 타임스스퀘어를 찾은 한인들은 타운홀이 항일유적지라는 사실을 알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맨해튼에서 7년째 살고 있다는 조유인(27)씨는 “타임스스퀘어를 자주 지나지만 전혀 몰랐다. 그런 자랑스런 역사 유적지가 뉴욕에 있었다니 놀랍다”고 말했다. 유학생 아들을 위해 미국을 방문했다는 한 중년 남성은 취재진의 설명을 듣자 아들과 함께 타운홀로 곧장 발걸음을 옮겼다.

타운홀에서 10분 정도 남쪽으로 내려가면 또 다른 항일독립운동 유적지를 만날 수 있다. 32스트릿 한인타운과 맞닿아 있는 34스트릿과 6애브뉴 사이에 한때 세계 최대의 호텔로 불렸던 구 맥알핀 호텔이 그곳.

1918년 맥알핀 호텔에서는 소약속국(小弱屬國)동맹회가 열렸다. 이 회의는 제1차 세계대전 종전을 맞이해 파리강화회의 등에 고무된 체코·폴란드·아일랜드·인도 등이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대응하기 위해 마련한 것이었다.

12월 14일에 열린 이 회의에는 샌프란시스코의 국민회 중앙총회와 뉴욕의 신한회 대표들이 각각 참석, 조선의 독립을 주장했다. 이 같은 활동은 AP통신 등을 통해 해외에 알려져 이듬해 재일유학생들의 2·8 독립선언과 3·1운동 촉발의 계기가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1912년 건립 당시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이 건물은 현재 고급 주상복합 건물로 탈바꿈했다. 한인타운과 함께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 메이시스백화점 등에 둘러 쌓여 한인들이 쉽게 볼 수 있는 독립운동 유적지다.

한 20대 한인은 “매일 같이 다니며 보는 건물인데 우리 선조들의 독립운동 역사가 숨어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고 흥미롭다”며 “주변 친구들에게도 이야기하겠다. 앞으로 이곳을 볼 때마다 느낌이 다를 것 같다”고 말했다.

5애브뉴를 따라 다시 남쪽으로 10분 남짓 내려가면 관광 명소인 23스트릿의 플랫아이언 건물을 만난다. 한인 관광객들이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많이 남기는 이 건물 바로 맞은편에는 현재 상점과 오피스 건물로 쓰이는 과거 5애브뉴 호텔을 볼 수 있다.

이 호텔은 조선 최초의 미국 사절단인 보빙사 일행이 체스터 아더 21대 미국 대통령을 만난 장소다. 정사 민영익, 부사 홍영식, 종사관 서광범 등이 조선 관리로는 최초로 미국 대통령을 접견, 자주독립국임을 천명했다. 당시 뉴욕에서 발간되던 신문은 이들이 아더 미 대통령에게 무릎을 꿇고 큰절을 올리는 사진을 게재해 화제를 모았다.

한인 학생들이 많이 다니는 명문 컬럼비아대 인근에서도 독립운동 유적지를 찾을 수 있다. 컬럼비아대 인근의 인터내셔널하우스가 그곳. 1924년 개관한 이곳은 뉴욕에서 공부하는 유학생과 학자들의 거주지로 지금까지 쓰이고 있다. 3·1운동 이후 국내 한인들의 미국 유학이 급격하게 증가하였는데 이들 가운데 일부가 이곳에서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1920년대 후반 오천석·장덕수·김양수·김도연·윤치영·윤홍섭·장리욱·이동제 등 10여 명의 한인 유학생들이 중심이 돼 인터내셔널하우스에서 북미대한인유학생총회 동부대회를 열었다.

1999년 뉴욕주 역사유적지로 지정된 이 건물은 한인 유학생 집회 장소로 쓰였을 것으로 보이는 공간 등 과거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내부에는 사진 등 각종 역사 기록들이 전시돼 있는 가운데 조국을 잃은 아픈 역사의 흔적도 엿볼 수 있었다.

1939년 이곳에서 거주하는 학생들의 출신국을 나타낸 자료에는 중국(54)·독일(46)·캐나다(23)·덴마크(23) 등에 이어 일본 출신이 22명으로 5번째로 많았다. 이 가운데는 한국 출신도 다수 포함돼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인터내셔널하우스 안내를 맡고 있는 카리 탄은 “80여 년 전 한국의 독립운동이 이곳에서 펼쳐졌다는 사실이 무척 흥미롭다”며 “보통 학기당 40여 명의 한국 학생들이 이곳에 산다. 이들을 만나면 이 사실을 알려주고 싶다”고 말했다.

인터내셔널하우스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115스트릿에는 뉴욕 독립운동의 산실로 많이 알려진 뉴욕한인교회가 있다. 1921년 컬럼비아대 맞은편에 설립된 뉴욕한인교회는 서재필·이승만·안익태·조병옥 등 수많은 애국지사가 거쳐갔다.

지상 4층 건물인 이곳도 과거의 모습을 온전하게 보전하고 있다. 1930년대 고 안익태 선생이 애국가 악상을 떠올리며 쳤던 피아노도 보관돼 있는 등 교회 구석구석이 역사적인 증거물이다.

하지만 독립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한 교회의 옛 모습은 멀지 않아 사라지게 된다. 이 교회 이용보 담임목사는 “설립 93주년을 맞아 건물 안전 문제가 심각하다”며 “이르면 오는 11월 교회 자리에 새 건물 공사를 시작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주일예배마다 150~200명 정도가 사용하기에는 너무 위험해 건물 신축이 불가피하다는 것이 교회 입장이다.

이 목사는 “최근 한국 보훈처 등과 상의한 끝에 교회 재정으로 새 건물을 짓고 1층과 지하실 등 일부 공간에 역사적 가치가 있는 유물을 전시하는 역사기념관을 만들기로 가닥을 잡았다”며 “역사적 가치가 있는 기존 건물의 외벽도 최대한 보존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공사가 시작되면 지금의 모습이 거의 남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뉴욕에서 숨쉬고 있는 독립운동의 자취에 대해 한인사회의 관심이 필요한 대목이다.

특별취재팀= 서한서 기자, 신성현·강윤지·조영재 대학생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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